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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가슴에 품고 만주를 누빈 여걸

<기획시리즈-경북의 여성로드를 가다> 1. 남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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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홍석천기자 |  2014.10.29 09:06:06

경북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신라 천년의 향기를 담은 경주나 선비문화의 수도 안동, 가야 문화의 본고장 고령 등 그야말로 발길 닿는 그곳이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이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이지만 지나온 시간의 절반을 차지했을 선조들의 어머니, 혹은 딸들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경상북도가 진행하는 역사 속 경북여성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 여행(女行)길’ 탐방은 매우 시의적절한 시도라는 평가다. ‘여행(女行)을 찾아가는 여행(旅行)’이라는 주제로 경북 여성들의 삶의 자취를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부. 혹한을 견딘 매화의 향기
1)나라는 품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2)하와이 독립운동가 이희경

2부.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다
1)경북 여기자 1호이자 종군 작가 장덕조
2)대구여자경찰서 초대 서장 정복향

3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1) 조선의 마지막 보모에서 육영사업의 시조가 된 최솔성당
2)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남자현 지사(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1962년 3월 1일, 정부는 모두 58명의 독립유공자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신채호 선생이나 이봉창 의사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이 수상자로 포함됐는데, 이들과 함께 최고 훈장을 받는 여성이 한명 있었다.

그녀가 바로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남자현 지사였다. 그녀는 46세의 나이에 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한 후, 의열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독립운동사의 열혈투쟁가였다.

◆운명에 맞서 만주로 망명하다

1873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통정대부 남정한과 이씨부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남자현은 일곱 살에 이미 한글과 한문을 터득하고, 14세에는 사서를 독파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1891년 19세에 같은 마을의 김영주와 혼인을 했지만 남자현의 결혼생활은 길게 가지 못했다. 을미의병에 나섰던 남편이 1896년 오십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이어 1907년에는 대한제국 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마저 해산되는 상황은 유복자를 기르며 시어머니를 봉양하던 남자현에게 전환점이 된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 남자현은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무너진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하게 된다. 한 자료에 따르면 1913년부터 최영호, 채찬, 이하진, 남성노, 서석진, 권모 등과 연락하며 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 5년간 국내조직에 참가한다.

그 뒤 47세가 되던 1919년 2월말 남자현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연희전문학교 근처의 한 교회에서 교회신자들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 열흘 남짓 서울에서 활동하다 마침내 3월9일 만주로 향하게 된다.

만주 서간도인 통화현에 도착한 남자현은 지인의 집에 아들을 맡긴 후 독립군 부대인 서로군정서에 가담한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해 독립군을 간호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 뒤 활동무대를 북간도로 옮겨, 주로 교회를 중심으로 여성교육에 나섰다.

50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까지 교회 설립과 여자교육회 조직, 그리고 순회강연 등을 통해 여성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데 힘을 쏟았다.

▲남자현 지사 생가(사진=홍석천기자)


◆의열투쟁으로 만주를 울리다

이러던 중 남자현의 이름이 만주 독립운동가 사이에 널리 떨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1927년에 일어난 ‘길림사건’이다. 길림사건은 독립운동계의 대동단결을 위해 길림성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도산 안창호 선생 등 지도자 300여 명이 중국 관헌에 붙잡힌 일이다.

이들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계가 구명운동에 나선다. 남자현도 이들을 옥바라지하며, 이 일을 여러 곳에 알리고, 비상대책반을 꾸리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석방을 위해 절치부심 밤낮으로 노력한다.

그런데 길림사건 이후 계몽교육에 치중하던 남자현은 의열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의열투쟁이란 적의 주요기관이나 주요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투쟁방법으로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테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략이다.

자료에 따르면 1933년 남자현은 사이토오 총독을 처단하려 나선다. 4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8발을 챙겨 직접 서울로 숨어든 남자현은 혜화동의 한 지인 집에 머물며, 교회신자로 변장하고 총독 암살을 준비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자현은 다시 만주로 발길을 돌린다.

1931년 10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김동삼 선생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갇히자 남자현은 친척으로 가장해 김동삼을 면회하고, 안팎으로 소식을 알리는 등 활약을 하게 된다. 심지어 신의주 이송 직전 구출작전을 세우기도 했지만 날짜가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일제의 만주 침략 직후인 1932년 남자현의 드높은 기개가 드러나는 일이 생긴다. 국제연맹이 만주에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소식을 접한 남자현은 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은 혈서를 써서 전달하기로 한다. 그녀는 하얼빈 남강에 있던 한 중국인 음식점에서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자른 후 ‘韓國獨立願’이란 다섯 글자를 쓴다.

독립을 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붉은 피로 쓴 것이다. 삼엄한 경계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남자현의 용기는 남자들도 감히 따르기 힘들 정도다. 이후 남자현은 만주에 파견된 일본 전권대사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거사 직전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남자현 지사 묘지(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마지막 뜻“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61세의 남자현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단식투쟁을 시작한다. 음식을 끊은 지 9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가혹한 고문과 단식으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혼수상태로 풀려난 지 닷새만인 1933년 8월 22일 남자현은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 진다”라는 말을 남기고 61세로 순국한다.

그녀는 ‘조선이 독립되는 날 자신의 돈 200원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것과 ‘손자에게 교육을 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남자현은 여성운동사에서는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 받기에 충분하다.

남자현은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 ‘구여성’이었다. 그러나 당당히 그 껍질을 벗고, 46세의 나이에 외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뒤 14년 동안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녀는 독립운동사에서 보기 드문 열혈투쟁가였다. 나라에서는 그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홍석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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