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 작가'로 잘 알려진 김정희 작가는 지난 25일부터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어머니의 뜰'이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8월 4일까지 열린다.
'2024년 JMA 서울스페이스(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전시'는 전북지역 출신 미술가 지원을 위해, 미술관 심의위원회가 3차에 걸쳐 선정한 작가들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2024년 특별전시다. 김정희 작가는 심사에 최종 합격해 미술관 전시를 하게 된 케이스다.
한편 이번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 전시가 끝나면 그 다음날인 8월 5일부터 15일까지 서울숲 1번 출구 '갤러리 스테어(GALLERY Stair)'에서 '맨드라미' 시리즈와 '금강산' 시리즈가 전시될 예정이다. 김정희 작가와의 만남은 8일 열린다. 다음은 이번 전시 작품의 평론이다.
작품 '기원'과 '블루 마돈나' 중심으로
지난 25일 필자는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김정희 작가의 '어머니의 뜰' 개인전을 직접 볼 수 있었다. 1층에는 '맨드라미 작가'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맨드라미(COCKSCOMB)' 시리즈 작품이 걸려 있었고, 2층에는 '블루 마돈나(BLUE MADONNA)' 시리즈가 전시됐다.
특히 이들 작품 중 1층에 걸려있는 작품 '기원(62x112.1cm oil on canvas, 2015)'과 2층에 맨드라미 꽃을 들고 있는 '블루 마돈나(Blue Madonna 193.9x130.3cm Oil on canvas, 2017)' 작품을 중심으로 김정희 작가의 작품 평론을 간략하게 하고자 한다.
김정희 작가의 '맨드라미'
후기 구조주의 관점의 '시뮬라크르' 탄생
김정희 작가의 이번 전시된 작품들은 단순한 '재현'이라고 볼 수 없고, 게다가 의미있는 '상징성'이 내제돼 있어서 후기 구조주의 관점을 통해 감상하고 평론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우선 후기 구조주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후기 구조주의 관점은, "그림은 실재의 모방이라는 전통적 '재현' 관점"을 해체하는 것이라고 거칠게 설명할 수 있다. 후기 구조주의(post structuralism)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부터 푸코, 데리다, 들뢰즈, 가타리, 리오타르 등이 기존 구조주의의 정합성과 보편성을 비판하고, 반면 구조의 역사성과 상대성을 부각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즉 김정희 작가가 그린 맨드라미는 '원본' 맨드라미를 '유사성'을 통해 재현한 것이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해체하고, 캔버스 속 맨드라미는 실재가 아닌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제3의 존재'가 됐다는 관점이다.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 '시뮬라크르'라고 부연할 수 있다.
일례로 작품 '기원'을 통해 살펴보면, 이 그림 속 맨드라미는 주로 붉은 색을 띄고 있는데, 모양이 마치 닭의 벼슬과 같다 해서 한자로 개관(鷄冠), 계두(鷄頭)라고 부르기도 한다. 벼슬과 승진을 기원하는 상징성이 담겨 있다.
또한 김정희 작가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한 상징성은 작가노트에 들어있는데, 김정희 작가는 "어머니는 맨드라미를 장독대 근처에 심었다. 뱀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맨드라미의 붉은 색감은 뱀에게 무서운 존재였나보다."라며 어릴 적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이는 어릴 적 기억과 연결된 복합적인 상징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더 깊은 작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어서 차후에 깊이있게 다룰 예정이다. 또한 작가의 기억 속 맨드라미에는 액운을 물리치는 한국적 정서도 담겨 있다.
결국 작품 '맨드라미'는 기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제3의 존재'로서 새롭게 태어났다. 이것은 플라톤적인 미메시스(모방)가 아닌 '시뮬라크르' 즉 들뢰즈로 시작해 보드리야르로 이어진 그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다.
즉 작품 '맨드라미'는 실재 맨드라미와 닮았지만 아무 상관이 없는 '시뮬라크르'로 탄생한 것이다. 또한 시뮬라크르 맨드라미 이미지는 실재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플라톤적 미메시스를 해체한다. 김정희 작가의 맨드라미가 특별하게 정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시뮬라크르, 실재로부터 자율성 획득
'블루 마돈나' 감상으로 고찰하기
이번에는 작품 '블루 마돈나'를 통해 그 '시뮬라크르'가 어떻게 자율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찰해 보자. 후기 구조주의 관점은 전통적 재현관을 해체함으로 예술을 원본, 또는 실재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 필자는 이를 '예술적 실재로부터의 자율성'이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자율성'이라는 단어의 반대어는 '구속성'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역사적으로 종교, 이데올로기, 형이상학 등으로 억압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기 구조주의 관점을 통해 이러한 억압을 해체하고 주체가 아닌 객체, 차별이 아닌 차이를 중요시하려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필자는 김정희 작가의 '(맨드라미를 들고 있는) 블루 마돈나'를 감상하면서 '블루 마돈나'가 제3의 존재로 탄생해, 예술적 실재의 자율성을 획득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도 블루 마돈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푸른색의 성모 마리아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정희 작가의 이 작품은 후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 즉 이 '형상'은 '생성'의 개념으로 '제3의 존재 되기'를 완수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은 가상의 실재 속에서 자율성을 획득한다. 이는 억압 없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호함을 통한 해석은 '감상자들의 몫'
지금까지 김정희 작가의 두개의 작품 '기원'과 '블루 마돈나'를 통해 후기 구조주의 관점에서 이 작품들이 왜 제3의 존재, 시뮬라크르인지 고찰해 보았다. 그에 더해 기존 플라톤의 개념을 뒤집는 자율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작품의 '모호성'이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존 재현 방식이 아닌 상징을 통해 의미가 전달된 작품을 어떻게 감상하고 해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다양한 감상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는 원래 복제의 복제를 의미한다. 새로운 감상자들의 주관적인 해석의 해석을 통해 작품, 시뮬라크르는 새로운 존재로 탄생할 것이다. 감상자들에게 여지를 남기는 김정희 작가의 작품들은 그 '모호성'을 통해 '예술적 유희'를 즐기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CNB뉴스=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