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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정의-양심 안 벗어났다”는 조 대법원장 … 아이히만도 양심 있었다는데

왜 우리 헌법은 그 위험한 ‘양심’에 따라 판결하도록 놔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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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영태기자 |  2025.10.15 12:30:46

조희대 대법원장이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법원 등에 대한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회가 선언되자 법사위 회의실을 나서고 있다. 왼쪽 위는 무소속 최혁진 의원이 든 규탄 팻말. (사진=연합뉴스)


조희대 대법원장은 13일 대법원 국정감사에서 “저는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 왔으며, 정의와 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를 둘러싼 작금의 여러 상황에 대해서는 깊은 책임감과 함께 무겁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고 인사말을 했습니다.

법률과 정의-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법부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돼 안타깝다는 대법원장이 말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정정당당한 판결에 대해 ‘반대 세력’이 트집을 잡는 게 현실이라면 대법원장으로서 준엄하게 꾸짖어야지 왜 안타까운지 듣기에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양심에 따른 판결’ 권하는 한국 헌법

그리고 저는 조 대법원장의 말 중 특히 ‘양심’이란 말에 관심이 꽂힙니다. 왜 한국 헌법은 법관으로 하여금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103조)”고 규정했는지를 AI(인공 지능)에게 물어봤습니다.

AI와의 대화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양심’을 동원해 판결하도록 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대만, 필리핀,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랍니다. 반대로, 유럽 대륙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오로지 법률에 따라서만’ 판결하도록 규정했지 양심의 관여를 금지한답니다.

유럽 3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우 나치나 파시즘 체제 때 법관이 이념이나 주관적 판단을 동원해 법을 왜곡해 판결을 내린 역사에 대한 반성에서 법관들이 양심을 들먹이지 말고 ‘오로지 법률에 따라서만’ 판결을 내리도록 강제했다고 합니다.

반면, 일본은 태평양 전쟁 패배 뒤 미군정의 강권으로 ‘양심에 따라 판결’하는 문구가 헌법에 들어갔다고 하네요. 한국 헌법은 일본의 영향을 받았고요. 미군정의 강권은, 미국이 성문법 국가가 아니라 판례를 중요시하는 영미법 계통이기에 판결 시 도덕적 판단을 포함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렇답니다.

대만, 필리핀 역시 일본 또는 미국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독재의 경험에 따라 그리 됐다고 하네요.

 

13일 국정감사에서 "정의와 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며 인사말을 하는 조희대 대법원장.(사진=연합뉴스)


‘양심’이 얼마나 좋은 물건이기에

양심이란 말의 기본적 의미는 물론 좋습니다. 한자 뜻이 ‘좋은 마음’이잖아요.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는 양심에 대해 이렇게 풀이합니다.

흔히 ‘선량(善良)’을 묶어 쓰지만, ‘선’과 ‘양’은 다릅니다. 선은 ‘착함’이고, 양은 ‘평범함’입니다. ‘선인(善人)’은 성인군자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양인(良人)’은 평민과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선심은 ‘베푼다’고 하고, 양심은 ‘지킨다’고 합니다. ‘선심’을 베풀지 않는다고 나쁜 사람인 건 아니지만, ‘양심’을 지키지 못하면 인간의 자격을 잃습니다. 인간의 ‘양심(良心)’, 별것 아닙니다. (중략) 보통 사람도 ‘위선자’가 될 수는 있지만, ‘위량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위량僞良’은, 양심 없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짓이기 때문입니다.(‘망월폐견’ 303~304쪽)

전 교수에 따르면 선이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면, 양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최소한으로서의 ‘양심’이 때로는 큰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정도면 최소한은 충족된 거 아냐?”라면서 양심의 기준선을 아주 낮출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태를 지칭하는 훌륭한 우리 말이 있습니다. 바로 ‘양심에 털 난 사람’입니다. 전 교수의 말 그대로 양심이란 게 별것 아니기에 털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요.

아이히만에게 양심이란?

양심에 털이 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가 바로 희대의 나치 살인자라는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에 대한 전범 재판에서도 ‘양심’은 문제가 됐지요.

 

1961년 예루살렘 재판정의 아이히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그는 "나도 양심이 있다"고 대답했다. 


수백만 유대인 남녀와 아이들을 열정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죽음의 가스실로 보낸 이송 책임자 아이히만에게 검사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적 없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요. 양심에 털난 아이히만에게는 수백만 유대인의 목숨보다 상부의 명령을 받드는 게 더 자신의 양심에 중요하고 합당했다는 얘기지요.

허풍이 심했던 아이히만은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는 내 무덤에 웃으며 뛰어들 것이다. 500만 명의 유대인들의 죽음에 내 양심이 거리낀다는 사실이 나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라고요.

아이히만 재판을 현장에서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게는 그래서 양심이란 “인간에게 본연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여건에 이미 제약되어 있는 것일 뿐”이었다고 아렌트 전문가 김선욱 숭실대 교수는 해설합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쪽)

“양심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아렌트

또다른 아렌트 전문가인 윤은주 철학박사 역시 아이히만의 양심에 대해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아이히만)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의 본보기가 아돌프 히틀러였다는 점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중략) 아이히만의 태도는 모두의 기대에서 어긋났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도덕관념과 양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방향은 자신을 향해 있었으며 그 외의 것에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기’ 123~133쪽)

아이히만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단지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 히틀러였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이 “내게 양심이 없겠느냐?”고 강변하면 할수록 섬뜩해질 뿐입니다.

아이히만은 왜 히틀러를 가장 존경했을까. 그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히틀러)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백만에 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에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나치 시대에 많은 법률가들이 독재를 옹호했기에 독일 헌법은 '오로지 법률에 따라서만' 판결하도록 강제한다. 


어느 한 사람의 ‘양심(인간으로서의 평범한 마음)’이 특정 인사를, 예컨대 극우 인사를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로 정하고 따를 때, 그러면서 ‘내 양심에 따라’ 뭔가 결정하고 판결을 내릴 때 결과는 무서울 수 있음을 아이히만은 잘 보여줍니다.

아이히만의 양심 얘기를 하니 이런 반론도 가능하겠군요. “아이히만은 고교 중퇴자로 학력이 낮으니 그렇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또 합격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만이 판사가 되는데 판사의 양심이 허접하겠느냐?”는 반론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 판사의 절대다수를 배출한 서울대 법대 출신 중 일부가 자조적으로 “서울대 법대 내란과”라고 지칭하는 걸 보면, 시험점수가 최고점이라고 해서 양심이 반드시 최고로 깨끗한 건 아니며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요?

판사를 판결하는 독일과 ‘신성가족’의 한국

아이히만의 양심 같은 사례가 한국에는 없나요?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 8명의 사형을 확정했고 채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들 8명은 사형을 당합니다. 32년 뒤인 2007년 재심 결과 이들 8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됩니다. 4월 8일은 ‘사법 살인의 날’로 지탄받지만 정작 판결을 내린 대법관 중에는 “빨갱이는 죽여도 돼”라는 자신의 ‘양심’에 비춰볼 때 전혀 후회가 없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히만과 큰 차이가 있나요?

아렌트의 해석대로 양심이란 게 ‘환경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이라면, 이렇게 위험한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판결하라는 대한민국 헌법 103조의 규정은, 1975년 4월 8일과 같은 비극을 양산할 비옥한 토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독일 법 체계는 헌법에 ‘오로지 법률에 따라서만 판결하라’고 규정했고, 이어 형법에 ‘법 왜곡 죄’ 조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법 조항대로 하지 않는 ‘이상한’ 판결을 못하도록 헌법에 예방하고, 어기면 사후 처벌하는 방식입니다.

 

한국에서도 '법 왜곡 죄' 조항을 형법에 신설하는 문제가 거론되고는 있지만 실현은 요원하다. (사진=채널A 보도 화면)


조국혁신당 신장식 의원에 따르면 독일에서 2007~2017년 10년간 판사-검사에 대한 법 왜곡 죄 기소가 72건 있었고, 이 중 52건에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연간 10명 정도의 판사가 ‘법 왜곡 죄’ 조항에 걸려 증언대에 선다니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독일과 달리 한국은 ‘양심에 따른 판결’을 헌법이 권장하고, 법 왜곡 죄 같은 사후 처벌 조항도 없습니다. 경북대 법대 김두식 교수는 저서 ‘불멸의 신성가족’을 통해 판-검사들이 스스로를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신은 인간이 아니기에 실수나 죄가 있을 수 없고, 처벌도 불가능합니다. 구름 위의 ‘신성가족’ 입장에선 저 아래 흙밭을 뒹구는 보통사람들은 그저 개-돼지 정도에 불과해 보이겠지요.

조 대법원장은 안타깝다고 했지만, ‘신 급’ 판사님의 양심의 질에 따라 판결이 어디로 갈지 몰라 걱정해야 하는 한국 국민들에게 사법 현실은 참으로 ‘판사 지옥’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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