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부기자 | 2024.08.19 14:23:03
바그너의 음악극 형식을 차용한 유상통프로젝트의 가족음악극, '싸운드써커스' 공연은 클래식한 악기가 아닌 전자기타와 베이스, 드럼으로 신나게 시작했다. 17일 토요일 오후 파주도시관광공사가 시민들을 위해 무료로 기획한 파주시 공연장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부모로 구성된 가족들이 빼곡하게 앉아서 첫 연주에 깜짝 놀라며 즐거워했다.
연주가 끝나나 싶더니 어두운 관객석에서 피에로 분장을 한 배우가 천천히 무대를 향해 걸어왔다. 오히려 관객들이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 거리며 관객들을 쳐다보면서 들어오는 모습이 관객보다 더 관객적이다. 배우가 누군지 관객이 누군지 햇갈리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배우는 무대에 올랐다.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비눗방울쇼와 신나서 날뛰는 아이들이 마치 카오스처럼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마당놀이가 연상되 듯 자유롭게 배우와 연주자와 관객과 아이들은 그렇게 재각기 뛰어 놀았다.
관객을 반사해 보여주던 커다란 비눗방울은 아이들이 잡으려고 손을 내밀자 이내 터져버리고 사라졌지만, 아이들은 갑자기 사라진 비눗방울에 더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부모들은 아이들의 공연을 보러 온 어른 관객처럼 너무나 행복하게 아이들의 퍼포먼스를 보고 있었다.
이 공연에서 느낀 점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번 이 공연을 볼 기회가 있다면 꼭 보기를 권한다. 코스모스가 아닌 카오스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이유가 뭔지 생각하게 만들고 이내 그 즐거움에 빠지고 말테니까.
"이성의 시대가 지나고 감상의 시대로"
중세시대 본질인 신(神)이 지배하던 감성의 시대에서, 데카르트가 외친 코기토, 즉 이성의 시대인 모던을 지나 지금, 다시 감성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포스트모던의 시대가 온 듯하다.
이날 보여준 넌버벌 퍼포먼스, 가족 음악극 "싸운드써커스"는 그러한 포스트모던을 제대로 보여 준 공연이었다. 난장판이 된 무대를 끝으로 공연이 끝나자 아이들은 부모의 손을 잡고 중간 통로에 줄을 길게 섰다. 이날 공연한 배우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아이들을 이렇게 이끌었을까? 분명한 건 '이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카오스적인 즐거움에 흠뻑 빠진 아이들이 느낀 카타르시스는 감각적 감성이었다. 마치 문명이 생겨나기 오래 전 과거 어느 날, 신명나는 축제처럼 아이들은 배우와 하나가 돼 재각기 즐기고 날뛰었다.
클래식 공연을 가보면, 이 공연이 왜 카오스적이고 감성적인지 비교를 통해 대번에 알 수 있다. 아마도 아이들을 데리고 오케스트라 공연을 가봤다면 말이다. 공연 중 악장과 악장 사이 잠시 쉬는 시간, 깊은 침묵이 흐를 때, 아이들이 느낄 숨막힐 답답함은 이성이고 코스모스이며, 주체 중심의 사고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게 그렇다는 거다.
그러나 이 싸운드써커스 공연은 모든 것이 클래식과 반대다. 이성과 반대인 감성이고, 코스모스와 반대인 카오스이며, 주체 중심의 사고가 아닌 관객, 객체 중심의 사고다. 뛰어놀아도 되고, 소리쳐도 되고, 배우는 관객을 보며 신기해 해도 되고, 심지어 실수를 해도 된다. 그에 더해 이 공연은 언어를 배척한 넌버벌이어서 기표도 기의도 없다. 정신이 아닌 신체로 감각하고 움직이는 공연이 전부다. 너무나 포스터모던적이다.
리오타르의 예술론 '포스트모더니즘' 관점에서
포스트모던은 구조주의 특히 후기구조주의 철학에서 파생된 단어다. 리오타르가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의 저서 '포스트모던의 조건'에서 그는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현상을 이처럼 정의했다.
그는 20세기 모더니즘의 중요한 조류인 아방가르드 정신이 바로 포스트모던이 보여주어야 할 예술의 역할이라고 언급했다. 이 현상은 코스모스적인 정돈, 분석, 거대담론에 대한 회의와 불신을 담고 있다. 그것이 이데아이든, 신이든, 자아이든 거대담론이 하나의 틀 안에서 다양한 차이를 억압한 것에 대해 불쾌함과 불신을 나타내고 해방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카오스로 가자고. 주체중심이 아닌 객체, 타자 중심의 사회를 만들자고.
넌버벌 퍼모먼스 '싸운드써커스' 공연은 배우가 중심이 되지도 않았고, 엄숙한 관객이 중심이 되지도 않았다. 시끄럽고 산만한 아이들이 객체나 타자가 아닌 중심이 되어 공연과 더불어 행복한 카오스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계를 없애버린 포스트모던 음악극
아우라가 사라진 시뮬라크르
섞이고 중첩된 유상통프로젝트의 공연 '싸운드써커스'는 경계가 없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없어서 배우가 객석에서 공연하고 관객은 무대로 올라갔다.
바그너의 음악극이 그러하 듯 음악과 드라마가 섞여 있고, 고전과 현대가 믹스돼 있다. 넌버벌 프로젝트를 통해 언어 체계 이전의 순수함과 그 이후의 세계까지도 불규칙하게 섞여 있다. 이 음악극은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섞인 마치 '카오스모스' 같은 세상을 만들어냈다. 공간적인 면에서 거리공연, 극장공연의 경계도 없다.
음악극이 끝난 후 배우들과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길게 늘어선 관객들을 보면서 '아우라'가 사라진 '시뮬라크르'를 볼 수 있었다. 배우들이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바로 옆에서 아무런 아우라 없이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사진을 통해 복제된 그 관계는 의미를 갖고 아이들의 놀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사진들은 아이들의 마음 속에 의미있는 제3의 창조물 '시뮬라크르'가 됐다.
누구도 주인공이 되지 않은 음악극, 아니 관객이 주인공이 된 음악극, 유상통프로젝트의 넌버벌 퍼포먼스 가족음악극 '싸운드써커스'는 그렇게 너무나도 포스트모던했다. 그래서 더 즐거운 공연이었다라고 생각하며 바라봤다.
(CNB뉴스= 경기 파주/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