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부기자 | 2024.03.28 09:33:10
김영미 작가의 초대전은 3월 27일부터 4월 15일까지 구구갤러리 인사동에서 열린다. 작가의 초대를 받고 27일 작품을 감상했다. 작가의 전시된 작품들을 보고 느끼고 생각한 내용을 평론의 형식을 빌어 간단하게 담아 보고자 한다.
말레비치와 자끄 데리다의 중첩
먼저 CIRCLE 시리즈 작품들을 보면서 1915년 '절대주의'로 명명됐던 추상미술의 개척자,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떠올랐다. '관념의 순수 이데아'를 강조한 '절대성'으로 당시 추상미술의 종지부를 찍은 작품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김영미 작가의 캔버스 위에 가득 덮여진 검은색 아크릴과 돌가루 때문이다.
두번째로 떠오른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자끄 데리다'였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반하는 '헤체주의'를 표방한 이 철학자는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는 다소 결이 다를 수 밖에 없지만, 김영미 작가의 작품에서는 마치 하나처럼 상호 중첩되고 있었다.
필자가 김영미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 자끄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작가의 독특한 작업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작업방식은 '덜어내고 드러내다'
작가는 먼저 아크릴과 돌가루를 섞은 색을 캔버스 위에 5번 두껍게 올린다. 이후 검은색 아크릴과 돌가루를 섞어 그 위에 또다시 2번 올린다. 이렇게 작업하고 나면 다른 색을 숨기고 있어서, 겉에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깊은 검은색의 추상이 완성된다. 마치 말레비치가 연상되는 순간이다.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해 이 단계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영미 작가의 작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엔 경화된 표면에 물을 발라 표면을 부드럽게 한 후 날카로운 조각칼로 겉에 쌓여 있는 검은색을 덜어낸다. 일반적으로 평론가들이 '긁어낸다'고 표현했지만, 필자는 '덜어낸다'라고 주관적으로 표현하고 싶다. 무수히 덜어내는 작업을 통해 '관념의 순수 이데아'는 사라지고 그 속에 숨겨졌던 색이 형태를 띄고 '드러난다.' 따라서 필자는 김영미 작가의 작품을 "덜어내고 드러내는 해체"라고 명명하고 싶다.
김영미 방식의 해체는 '자신을 드러냄'
결국 필자가 본 김영미 작가의 헤체 방식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상처가 나고 조각이 떨어져도 그 아픔을 감수하면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업은 예술가가 자신의 순수한 내면 속으로 천착해가는 방식이다. 또는 자유를 찾아 보다 근본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번에 전시된 작품 중 갤러리 출입구 우측에 걸려있는 작품, CIRCLE(2024년작)은 독특하게도 겉의 검은색을 덜어내고 속의 색이 드러남에도 모자라 속의 색이 갈라지고 찢어진 모습이다. 속의 색만 찢어진 것인지 캔버스까지 갈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해체 방식의 깊이감이 느껴졌다.
27일 만난 김영미 작가의 최근 작품들은 '덜어내고 드러낸 해체'였다. 시뮬라크르 같은 현대에 원본같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의 '절대'는 '덜어내고 드러내는 해체'를 통해 잠시 들여다 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결국 작품들은 말레비치도 아니고 자끄 데리다도 아닌 '순수한 나'를 만나게 한다.
자끄 데리다의 말에 따르면 예술작품 속 진리는 작품 속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거나 부존재한다. 사실상 작가가 작업한 '작품의 진리'는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알려고 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순수한 내면에 대한 해석은 '작가의 진리'가 아니라 '주관적인 감상자'의 몫이다.
(CNB뉴스=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