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대한민국은 보건의료 재난 상황이다. 정부가 의대 입학정원 2000명 증원을 강행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반발하는 의료계의 집단행동 등 ‘강대강’ 대치 속 응급의료·수술·진료 등에 있어 심각한 의료공백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명분(?) 다툼에 볼모로 잡힌 것은 다름 아닌 국민이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생명과 안전이 위협당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가중되고 있다. 하지만 팽팽한 줄다리기 속 일단 이기고 보겠다며 서로 목소리만 높일 뿐이다. 땜질식 돌려막기에는 한계가 있다. 고스란히 피해를 당하는 애꿎은 의료소비자들은 고립무원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내 부모 자식 형제들이 불안에 떨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현실이다. 의료공백 사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서로가 네 탓이라고 부르짖기만 할 것인가. 정부나 의료계 모두 국민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솔직히 양쪽 모두 국민을 위한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순수하게 와닿지 않는다. 이렇게 환자들을 내몰아 놓고 무슨 정당성을 따지는지 모르겠다. 당장 의료정상화에 나서야 한다. 국민이 인질이 될 순 없다.
그렇다면 政-醫 대립각의 원인인 2000명이라는 숫자는 어디에서 근거했을까. 따져봐야 한다. 정부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KDI, 서울대학교 3개 연구를 참고했다고 밝히고 있다. 3개 연구보고서 모두 고령 인구 증가에 따라 미래의 의료 수요가 늘어 오는 2035년 기준으로 약 1만명의 의사가 부족한 것으로 추계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매년 2000명을 늘려야 한다는 얘기는 없다. 다만, 보건복지부와 교육부가 지난해 10월 27일부터~11월 9일까지 2주간 전국의 40개 의과대학을 대상으로 2025학년도 증원수요를 조사했는데 최소 2151명에서 최대 2847명으로 나타났다. 또한, 각 대학은 정원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2030학년도까지 최소 2738명에서 최대 3953명을 추가 증원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즉, 3개 보고서와 수요조사를 통해 2000명이라는 숫자가 나왔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현재 의대 입학정원은 연간 3058명이다. 의약분업 이후 351명의 정원을 줄여 2007년 이후 동결됐는데, 정부에서 앞으로 2000명을 추가로 늘려 5058명까지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지난 4일까지 의과대학 운영 40개 대학이 교육부에 제출한 2025학년도 의대 정원 증원 신청 인원은 총 3401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2025년 증원 가능하다고 회신한 최대 규모인 2847명을 크게 상회하는 수치다.
정부는 앞서 약속한 대로 증원 규모는 2000명으로 못 박고 각 학교별로 배분할 예정이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문이 있다. 수요조사를 앞세운 ‘2000명’이라는 숫자에 대해서다. 납득할 만한 뚜렷한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왜? 꼭 2000명인가에 대해선 명쾌하지가 않다.
아울러 정부는 의사 수 확대와 더불어 지역의료 강화, 의료사고 안전망, 공정 보상 등을 내세운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의료계에서는 고개를 젓고 있다.
의사들은 이 패키지가 임상 수련과 연계한 개원면허의 단계적 도입, 의사의 진료 적합성 검증체계 도입, 비급여 혼합진료 금지, 지불제도 개편, 비전문가에 대한 미용의료시술 자격 확대 등 국민의 자유로운 의료선택을 제한하고 의료비용 지출 억제에만 주안점을 둔 잘못된 정책이라며 절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각설하고, 일단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OECD의 ‘한눈에 보는 보건의료 2023’에 따르면 국내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6명으로, OECD 평균인 3.7명에 못 미치는 최하위 수준이다.
그렇다면 그 실행방법에 있어서 대화와 타협 그리고 순차적으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찍어 누른다고 능사가 아니다. 방향이 옳다고 해서 무조건 강행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설득과 타협이 실종돼 국민이 파편을 맞고 있다는 점에서 맹목적으로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절대 선’이라고 주장하며 따르라는 것은 독선이자 오만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충분한 명분과 이해 그리고 국민적 지지로 시행함이 옳다. 더 길어지다간 정말로 큰 사고가 예견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이다. 대립각으로 극렬한 평행선을 달리는 와중에 그 무엇보다 위에 설 국민은 실종됐다.
집단행동에 나선 의료계에 곱지 않은 시선은 누적되고 있다. 양측 모두 고집에 양보가 없다. 국민의 걱정과 불안은 분노로 승화된다. 정부는 국민 곁에, 의사는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
또 하나 따져 볼 게 있다. 과연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필수·지역의료를 육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냐는 물음이다. 확대된 의사 인력이 필수의료 분야나 의료취약지에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한 설계가 없는 상태다.
현재 저출산 등으로 인해 각급 의료기관의 소아・청소년과(이하 소청과)는 폐과/폐원하고 있고 전공의들도 소청과를 기피하고 있다. 의사 인력은 미용‧성형 등 인기과와 수도권에 밀집되고 있으며, 필수진료과나 의료취약지의 의료공백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난해 발표한 ‘2022 지역별 의료이용 통계연보’에 의하면 2022년 서울에서 진료받은 건강보험 가입자 10명 중 4명이 다른 지역 거주 환자였다. 이러한 쏠림 현상 등 의료 불균형 대란의 대안을 서둘러 찾아야 한다.
공공의료 강화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에는 공공의료 부문을 담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코로나19라는 악몽을 겪으면서 공공병원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금 인식하게 됐다.
의료 재난 상황에서 공공의료의 필요성은 부각되고 있지만 사실상 방치돼 있다.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의료기관 비중은 5.2%다. 병상 수로 보면 9.5%에 불과하다. 이러한 공공의료를 넓혀 의료공공성 확보는 물론 지역의료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현재 국회에는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김성주 의원 대표발의)’이 계류 중이다. 이 법률안은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을 설립 의학전문대학원과 보건대학원 등 공공보건의료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 및 연구 체계를 갖추고 이를 국가가 지원토록 명시했다.
아울러 졸업한 의료인력에 대한 의무복무의 법적 근거를 마련해 의료서비스 지역 격차를 해소하는 한편, 감염병 대응능력 강화에 필요한 공공보건의료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토록 하고 있다.
해당 상임위인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의결돼 지난해 12월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지만 다뤄지지 않고 있다.
본회의에 오르지 못해 곧 다가오는 21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 ‘지역의사 양성을 위한 법률안(대안)’도 같은 처지다.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헌법 제36조 3항)’. 의료취약지역의 심각한 의료자원 불균형과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선 공공의료 확대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반대도 상당하기에 사회적 합의의 접점을 찾기 위한 논의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새롭게 탄생할 22대 국회에 기대를 걸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