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부기자 | 2023.10.17 09:37:16
"하루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가을인가. 바닷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도 사뭇 차가워지고. 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난 14일 안타깝게 타계한 박서보 작가는 지난 9월 22일 '마지막 개인전'일 열리고 있는 부산 조현화랑을 방문했다. 이날 가족들과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의미깊은 글귀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글이 마지막 SNS글이 됐다.
하지만 박서보 작가와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부산 조형화랑에서 그의 마지막 개인전을 감상할 수 있다. 박서보 개인전이 조현화랑 달맞이와 해운대점에서 8월 31일부터 11월 12일까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현화랑 달맞이 돌계단을 올라보면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조현화랑 달맞이'의 돌계단을 올라 커다란 철문을 열면 평소 전시실과는 사뭇 다른 어두운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넓이 5,50m, 높이 2,50m의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화면은 묘법의 강렬한 색감과 입체감 있는 질감을 초고해상도로 확대하여 움직임을 부여한 디지털 작품이다.
아주 작은 지점에서 시작되어 전체로 확장되면서, 평소 눈으로 관찰할 수 없었던 세밀한 디테일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박서보 작가의 손자 박지환이 제작한 것으로, 아날로그 방식에 익숙하던 작가가 디지털 문명을 대면하며 느낀 공포심에 대한 돌파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색채가 다음 세대를 통해 디지털 화면으로 재해석된 의미가 크다.
전시장을 가득 채우는 연보라의 오묘한 빛을 따라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환영 속을 거니는 끝에, 디지털 작품의 원형이 비좁은 전시실에서 발견된다. 1000호에 달하는 박서보의 연보라 묘법은 2010년에 제작된 것으로, 캔버스 표면에 올려져 일정한 간격으로 그어내는 과정에서 눌리고 밀리면서 선과 색을 안으로 흡수하는 한지의 물성이 연보라색과 어우러져 비움을 통한 채움의 정신성을 묵묵히 발현한다.
손의 흔적을 덮는 규칙적인 선이 만들어내는 절제에 담긴 색감이 자연의 자기 치유 능력을 발휘하듯 소멸하고 소생하길 반복하며 기운을 흡수하고 또 발산한다.
조현화랑 2층에선 연필묘법 신작 12점 진열
전시는 화랑 내부의 계단을 통해 2층에서 이어진다. 고요한 푸른 색감으로 칠해진 커다란 전시 공간에는 박서보가 1986년 중단하였다가 최근 작업에 재개한 신작 연필 묘법 12점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밝은 파스텔 톤의 색감 위로 반복과 평행의 리듬감 있는 신체성을 드러내는 연필묘법에 대해 박서보 작가는 “무목적성으로 무한반복하며 나를 비우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캔버스 표면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연필 묘법은 세살난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면서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연필로 빗금을 치는 모습을 보고 체념을 떠올리면서 시작됐다.
박서보 70년 화업..."지치지 않는 수행의 결과물"
조현화랑 관계자는 "손에 한지가 닿을 때 그 방향을 바꿔서 진행하는 과정은, 묘법을 매일같이 그려오며 신체와 같이 익숙해 졌기에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 자연의 빛을 정신화한 파스텔 톤의 작품엔 알 수 없는 위로와 안정감이 깃든다."라며 "유화물감이 밀리고 한지가 찢기는 물성에 세밀하게 반응하는 거장의 자유로운 손길이 경직된 모든 것을 극복한 온화하고 따스한 파스텔 톤의 색채와 더불어 존재 이전의 무한으로 뻗어나간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전쟁을 겪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했던 젊은 시절의 좌절을 돌파해낸 의지로, 불규칙하고 거친 자연에서 광활한 시야로 자정 능력을 길어낸 박서보에게 자연과 화폭은 물리적인 대상인 동시에 은유이다. 오랜 시간의 수련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화폭에 담아 조율하는 박서보의 묘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 없이 변화하며 확장되는 힘을 느끼게 한다."고 덪붙였다.
박서보 작가의 이번 조현화랑 전시는 70여년이 넘는 화업 동안 끊이지 않는 탐구와 실험 정신으로 생의 마지막 날까지 묘법 시리즈를 지속해온 박서보의 지치지 않는 수행의 결과물이다.
(CNB뉴스=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