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는 식감이 있다. 곱씹을수록 말맛이 살아난다. 어떤 단어는 그 단어로 쓰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태어난 것 같다. 특히 이름이 그렇다. 너 아니면 안 되는 그런 이름이 우리말에 유독 많다. 그 맛을 녹진히 느낀 건 김훈 산문집 <자전거 여행>을 읽을 때였다. 한국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전거로 밀고나가는 장면에 매료되다가 이 대목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숲’이라도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숲의 이름은 과연 숲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취재 분야에 세계 1등을 다투는 기업이 많아서인지, 그들이 쓰는 용어, 내놓은 제품의 이름도 세계적이다. 영문명이 많다. 다민족과 다문화가 중시되는 글로벌 시대에 ‘우리’ 우선주의를 내세우자는 건 아닌데 딴죽을 걸고 싶을 때가 있다. 왜 그렇게 이름 지었어요? 안 그래도 될 거 같은데요?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반대라서 눈에 띄는 사례가 있다. ‘틔운’. 집에서 식물 키우는 용도의 LG전자 가전제품이다. 만약 틔운이 아니라 그로운(grown)이었다면? 그다지 달라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새싹은 틔울 때 가장 설레니까 이름이 더 와 닿는다.
찾아보니 재밌는 우리말 작명이 많다. 주로 자동차에서 발견된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를 뜻하는 ‘맵시’, 거침없이 세상을 누빈다는 뜻의 ‘누비라’는 발음을 해도 입안에서 잘 굴러간다. 뜻도 잘 이해되고. 최초 국산 자동차의 이름은 원초적이며 화끈함의 끝판 대장이다. ‘시발’.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자동차가 첫 시동을 걸었으니 이보다 적확한 이름도 없는 셈이다. 시발, 거참 잘 지었다.
더 찾아보니 과거 재밌는 이벤트가 있었다. 삼성전자가 자사 제품명을 한글로 바꾸고 맞혀보라는 거였다. 문제는 이렇다. ‘한울 똑따기’가 뭘까요? 보기로 셋을 냈다. ①갤럭시 워치5 ②비스포크 큐커 ③갤럭시 플립4. 똑따기로 쉽게 유추 가능하다. 시계가 똑딱똑딱 가니까. 거기에 우주를 의미하는 한울을 갤럭시의 대체어로 넣었다. 다른 문제는 미궁 속이다. 마뜩찬틀? 모르겠다. 냉장고란다. 마뜩하다와 찬틀을 합쳤단다. 새나초롱? 알쏭달쏭하다. 뭔가 빛날 거 같다. 답은 빔 프로젝터 더 프리스타일이란다. 설명이 길다. ‘새가 나는 것처럼 자유롭게 아름다움’의 새나와 ‘맑고 영롱하게 빛나다’의 초롱을 합친 단어다. 어두운 환경에서 밝게 보는 것이 이 제품의 상징성인만큼 ‘초롱’ 하나로 설명은 다 된다. 청사초롱까지 갔으면 무리수였겠지만.
인터넷에서 봤다. 요즘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K-꼴값.’ 한글을 두고 굳이 영문으로 바꿔 쓰는 행태를 꼬집는다. 어느 카페에 이런 메뉴가 있단다. ‘M.S.G.R.’ 미숫가루를 저렇게 써 놨다. 작성자는 MSG 친 게 아니라 실제로 있다며 메뉴판 사진도 올렸다. 고급스러움을 내세우는 백화점이나 일부 대형마트는 한글을 내치고 영문을 우선하기도 한다. elevator, concierge, stationery, princess를 이정표에 새기고 찾아가라 한다. 영문을 모를 일이다. 영문을 쓰면 고급스러워지나? 이거야 말로 굳이, 아닌가. 우리말을 두고 ‘오버’해선 안 될 일이다.
한글날에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열없다. 하지만 확신하는 건 익숙한 우리말로 지은 이름은 미감(味感)이 좋다. 잘 씹힌다. 꾸밈이 없어 은근하다. 그-로-숴-리나 컨-쉬-얼-쥐는 더부룩하다. 쉬워서 소화가 잘되는 이름이 한국어에 있다.
(CNB뉴스=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