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네덜란드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알리려고 했던 이준 열사의 유해 봉환 60주년이다. 이준 열사를 기리는 추모 특별전인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특사’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준 열사는 대한제국의 1세대 검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07년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자주독립을 보장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러시아, 미국, 영국 등 주요국의 무관심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분함을 참지 못해 음식을 끊고 현지에서 운명했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네덜란드에 모셔졌다가, 1963년 남한으로 봉환해 서울 수유동에 안장됐다.
이번 추모전에서는 1858년 조선 북청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검사로 활동했던 이준 열사의 생애 전반을 살펴볼 수 있었다. 고종 황제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당시의 문서와 기사 자료 등도 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국 명단도 있었는데, 대한제국(Coree)은 47개국 초청국 리스트 옆에 아직 참가 여부를 답변하지 않은 7개국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준 열사는 고종에게서 친서와 신임장 등을 받아, 일본 나가사키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페테르부르크, 독일 베를린 등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해 있지 못했고 일본의 조선 침탈이 시작된 후라서, 이준 열사 등 3명의 특사는 안타깝게도 만국평화회의가 시작되고 열흘이 지난 후에 도착해 정상적으로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 분함을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후대에 마음과 뜻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추모전에는 젊은 시절의 이준 열사 사진도 있었다. 이준 열사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체포된 이들을 사면 대상자로 올려 친일 법무대신 등과 충돌해 해임되기도 했으며, 동경전문학교 법률학과에서 공부하며 친필 유묵 작품을 남겼다. 국채보상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된 후에 이준 열사에 대한 추모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준열사추모대회준비회에는 이승만, 김구, 여운형 선생 등이 추대됐고,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지키기 위한 활동과 독립운동, 건국 과정에 영향을 준 중요한 인물이다.
근현대사기념관에서 눈에 띈 다른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과 대한민국 헌법이었다. 1층에 있는 상설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데,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은 1919년 제정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하고,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하며, 인민은 남녀, 귀천, 빈부의 계급이 없고 평등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종교와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소유의 자유를 향유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고 적혀 있었다. 교육과 납세, 병역의 의무가 있으며, 신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인류 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고 했다. 국토 회복 후 만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하고, 구황실을 우대하며, 생명형과 신체형, 공창제를 전폐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대한민국 제헌헌법은 1948년 제정됐는데, 민주공화국이라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을 토대로 임시정부 헌법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에 국권을 빼앗겼던 나라를 반듯하게 다시 세우는 과정에 이준 열사 등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포함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봤다. 근현대사기념관이 있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는 국가보훈부 산하 국립4·19민주묘지와 통일부 산하 국립통일교육원, 문익환 선생 통일의 집 등이 함께 있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픔, 현재까지 이어지는 혼돈,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번영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많은 동네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이 더 깊게 들었다.
최근 미국 워싱턴DC 인근에 있는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이 만났다.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한미일 협의에 대한 공약을 채택했다. 한미일 3국은 공동의 이익과 안보, 경제 등에 협력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긴장 문제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를 지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한미일 동맹 강화는 현재 시점에서 민주주의 국가의 안보를 강화하고, 장기적으로 인류 전체의 평화와 지속 가능한 성장, 민주주의의 발전, 개인의 자유와 평등 보장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과 북한 문제에서도 리딩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최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공식회의에서 탈북자 청년이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비판했다. 남한에 거주하며 한국외국어대에 다니는 이 청년은 가족의 탈북 사실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로 고모가 정치범수용소에서 고문과 구타를 당한 사실 등을 고발했다. 이 문제에 대해 유엔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와 중국은 논의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이날 북한 인권 안건은 공개적인 반대가 없어서 투표 없이 의제로 채택됐다.
조선, 대한제국, 일제 시대를 거쳐서 해방을 맞이하고, 서구 열강의 결정으로 신탁통치와 분단을 맞이한 남한과 북한. 6·25전쟁을 거치며 분단은 고착됐고, 이 문제는 여전히 동북아시아와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갈등 요인으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 한 곳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독립기념관 관장)의 책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들’을 보면, 당시 조선에는 총 6개의 임시정부가 있었다. 이는 임시정부 성립을 선포하고 각료를 구성해 발표하고 활동한 임시정부만을 꼽은 것이다. 이 6개 임시정부의 행정수반이나 중요 각료를 모두 지낸 인물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정 문제 등으로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후에 복권되고, 남한에서 부정선거 등으로 하야한 민주주의 사회 관점에서 역사적인 문제도 있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 스스로 변해야 한다. 북한의 정치와 법, 행정 체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에 부합하는지, 중국과 러시아, 베트남, 라오스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최신 경향과 부합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어 보였다.
그것은 북한에 거주하는 사람들, 자국민의 인간적 권리 향상을 위한 것으로 평화를 위해 군사력 증강보다 경제적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사회주의 국가 중에 3대에 걸쳐 권력을 이어간 나라는 없는데, 중국과 러시아도 자국으로 유입된 탈북자를 난민으로 보고 그들의 의사에 따라 인도를 하는 국제적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중국, 러시아의 시민들도 여행과 유학, 사업을 하기 위해 북한이 아니라 남한으로 대거 찾아오고 있다. 이런 딜레마의 굴레라는 문제에서 북한, 중국, 러시아가 벗어나야 동북아시아와 인류의 보다 안정적인 평화가 보장되지 않을까. 이는 한미일 동맹의 안전과 번영, 인류 전체의 안녕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종교와 인종 차이에 대한 화해가 필요해 보였다.
이런 변화 위에 남북 경제 협력과 정치적 화해가 시작되길 소망해본다. 최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이 무산됐는데, 창업자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방북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진행하던 시절도 있었다.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인 현대엘리베이터의 해외 사업도 북한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러시아와 중국에 진출해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도 많은데, 러시아와 중국도 보다 발전적인 경제 협력을 위해 이런 문제들을 보다 면밀하게 생각해볼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CNB뉴스=손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