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정무위원회의 문턱을 넘었다.
이 개정안은 보험회사로 하여금 실손의료보험의 보험금 청구를 위한 전산시스템을 구축‧운영(전문중계기관에게 위탁 가능)토록 하고,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 등이 요양기관에게 보험금 청구와 관련된 서류를 보험사에 전자적으로 전송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함이 골자다.
쉽게 말해 의원·병원 등에서 환자에게 서류로 제공했던 진단서 등 보험청구용 증빙자료를 전자문서로 중계기관을 통해 보험사에게 보내지도록 한 것이다.
실손보험은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국민의 의료비를 보장하기 위한 보험상품으로, 약 3500만건 이상의 계약이 체결돼 있다. 하지만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 등이 보험금을 지급받기 위해서는 병원·약국에서 보험금 청구를 위한 서류 등을 발급받아 이를 보험설계사 또는 팩스 등을 통하거나 보험사에 직접 제출해야 하는 등 청구 절차가 매우 불편하다는 불만이 제기돼 왔다.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다 보니, 소액인 경우에는 아예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기도 하는 실정이다.
이에 지난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실손보험이 비효율적이고 불편하다는 지적에 제도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고, 2016년 금융위원회·보건복지부 등 정부 합동으로 온라인을 통한 간편하게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개선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국회에서의 움직임은 시원치 않았다. 지난 20대 국회에서도 별다른 진전 없이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가 이번 21대 국회에서 전격적으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요번에 상임위인 정무위에서 가결된 만큼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는 수순이 남아있는데, 여·야가 모처럼 결과물을 만들어 가고 있기에 추이는 지켜볼 일이다.
그동안 법안 논의가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아무래도 의료계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을 중계기관으로 해 의료기관에 보험사로의 청구를 강제화하는 법안에 대해 거부해 왔다.
심평원은 건강보험 체계 내에서 병원들이 진료비를 급여 청구했을 때 심사하는 기관이다. 실손보험은 기본적으로 본인이 부담하거나 국가가 케어해 주지 않는 비급여 부분을 커버해 준다. 즉, 의료계에서는 이 중계기관이 심평원이 되면, 비급여 부문의 속살이 아무래도 공개됨에 따라 꺼릴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 있다.
심평원이 결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전산으로 내역이 축적되면 비급여 항목을 청구하기가 어려운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이에 지난해 가을부터 금융위원회에서는 의료계와 보험협회가 함께 참여하고 있는 정부 산하의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에서 십여 차례 회의를 해오며, 심평원이 아닌 보험개발원을 중계기관으로 하는데 조율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보건의약계는 보험개발원도 안된다며 앞서 논의된 내용들은 철저히 묵살되고, 입법 과정은 무시된 채 보험업계의 입김에 휘둘려 급박하고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다며 경악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정보 전송의 주체가 되는 환자와 보건의료기관이 자율적인 방식을 선택해 직접 전송할 수 있도록 법안에 명문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송대행기관에 정보의 통로만 제공하는 플랫폼은 정보 누출에 대한 관리와 책임만 질 수 있는 기관이면 충분하기에 관의 성격을 가진 심평원, 보험료율을 정하는 보험개발원은 대상에서 제외 ▲국민의 편의 증진을 위해 보험금 청구 방식·서식·제출 서류 등의 간소화, 전자적 전송을 위한 인프라 구축 및 비용 부담 주체 결정 등 선결돼야 할 과제부터 논의 등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요양기관에 막대한 부담 전가는 물론 국민의 혈세 낭비와 공공의 이익마저 저해하면서 보험업계의 이익만을 대변할 뿐이라며, 전송 거부 운동 등 보이콧과 위헌소송도 불사하며 강경 대응하겠다는 방침이다.
이 같은 반발은 직접 이해당사자의 입장이라는 점에서 차치하더라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마냥 긍정적이라면 고개를 가로저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시민사회단체도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개정안이 국회 최종관문을 통과하면 소액보험 청구가 쉬워지면서 소비자에게 연 2000~3000억원의 이익이 돌아갈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한국소비자단체연합(금융소비자연맹, 해피맘, 소비자와함께, 건강소비자연대, 한국소비자교육지원센터, 금융정의연대, 소비자권리찾기시민연대, 의료소비자연대, 한국납세자연맹 등)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있다.
반면,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한국 루게릭 연맹회, 한국폐섬유화 환우회, 보암모,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 등에서는 법안 폐기를 부르짖고 있다.
반대의 이유는 뭘까.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개인의료정보의 위험한 축적과 활용 및 유출, 민간보험사 이윤 극대화를 위한 법이라고 규정했다.
보험사들은 손쉽게 대규모 환자정보를 축적할 수 있게 된다. 금융위는 목적 외 사용은 금지한다고 했지만, 보험사들이 거부하면 목적 외로 사용했는지 쉽게 알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기업 영업비밀이라며 감추고 꼼수를 부린다면야 막아내기 쉽지 않다.
더군다나 보험가입 거절과 할증은 물론 보험금 지급 거부 사유를 쉽게 찾아낼 것이라는 염려다. 충분히 의심할만한 대목이다. 보험사들의 배만 불릴 것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인데, 기업은 응당 이윤을 추구한다.
매년 수천억원의 보험료를 지불할 것이라는 관측에서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외치고 있는 보험사들. 업무 처리 향상 및 보험소비자들을 위한 숙원사업이라고 외치는 것을 온전히 믿기에는 거부감이 든다. 아무래도 이득이 되기 때문일 게다.
소규모 보험금을 지급하더라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액수가 큰 보험금은 내어주지 않아 오히려 소탐대실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은 충분히 가중될 수 있다. 소정의 미끼 이벤트에 낚여 개인정보를 퍼주는 것과 다름없을 수 있다.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인 국민에게 돌아온다. 작은 편의를 바라다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소비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시나리오로 개인정보 집적으로 인한 피해와 더 나아가 ‘의료민영화’라는 망령이 피어오를 수 있다는 점에도 방점이 찍힌다.
‘의료민영화’에 대한 우려는 심각히 따져볼 부문이다. 정부가 이달 1일 발표한 ‘데이터 기반의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고도화’ 방안에는 ▲국가재정 투입 데이터의 개방‧공유 의무화, 건강보험 데이터의 민간기업 활용 촉진을 위한 지침 개정 및 데이터 개방(’23.下) ▲보건의료데이터 수요·공급을 연결하는 중개 플랫폼 구축 ▲공공기관 및 민간병원의 데이터를 활용한 의료 마이데이터 도입 등을 담고 있는데 여기에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병원→보험사, 23년 보험업법 개정)’도 포함돼 있다.
‘의료민영화 저지와 무상의료 실현을 위한 운동본부’ 등에서는 이는 모두 건강보험공단 등 공공 영역의 개인의료정보 보유·활용을 민영화하는 내용이라고 치부했다. 정부 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보험’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의료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축적해야 하기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의료민영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
보험사들은 이렇게 쌓은 정보를 소위 ‘비의료 건강관리서비스’라는 이름의 만성질환 치료·관리 상품판매에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보험업법 개정은 보험사·의료기관 직접 연계의 시작으로. ‘의료기관-보험사 전자정보 교환’ 다음은 ‘의료기관-보험사 직불제도(민영보험도 공보험처럼 의료기관과 직접 계약)’로 보험사들이 오래전부터 이를 밀어붙인 이유는 의료기관과 보험사를 연계시키는 초석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저울질해볼 필요가 있다. 예전 방식을 유지한다면 약간의 불편함과 수고스러움이 있지만 야기되는 부작용 등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도입되면 편리해지겠지만 소비자에겐 그뿐이고 이 시스템이 괴물이 돼 돌아올 수 있다는 염려를 안고 가야 한다.
제도가 마련되면 따라야 하는데 정치권에서 소비자 편익만을 살리고, 이를 이용해 사기업이 농간을 부릴 수 없도록 철저하게 막는다면야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모두가 인지하다시피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이라고 했다. 보험사들이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기업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각설하고, 원론적으로는 민간보험 청구 방법 개선을 따질 게 아니라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가 우선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최종 가계 소비 중 의료비 본인 부담 지출 비율이 5.3%로 OECD 평균 3.1%보다 높다. 국가가 지출하는 의료비의 GDP 대비 비율은 4.8%로 OECD 평균 6.6%에 크게 못 미치며, 건강보험 보장성은 OECD 평균이 74%나 우리나라는 61%에 그치고 있는 상태다.
민간보험을 강화하고 편의를 봐줄 게 아니라, 전 국민의 의료보장인 건강보험 보장성을 끌어 올리는데 여력을 쏟아야 한다.
‘실보 청구 간소화’. 무턱대고 받아들였다간 크게 토해내야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순전히 국민 편익만을 위한 제도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겠는가. 가능성이라는 것은 1%라도 있다면 충분히 의심해도 부당하지 않다. 데이터는 축적된다. 향후 추이에 촉각이 곤두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