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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외교, 가까워질 수 있겠지만 존중이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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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이성호기자 |  2023.04.28 10:40:25

지난 3월 1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시민사회 입장 발표 기자회견 모습. (사진=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일본 전범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투자를 끊어야 한다”

이는 2018년~2019년 당시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사안 중 하나다. 2018년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한민국 대법원은 승소 판결을 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부정하며 일방적으로 수출 규제라는 무역전쟁을 일으켰고 한·일 관계는 아시다시피 냉랭한 온도를 유지해 왔다. 일본의 일방적인 무역보복으로 인해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공단의 5년간(2014년~2018년) 전범기업 투자 평가액이 5조6600억원에 달한 것이 문제시 됐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인정치 않고 대한민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수출절차 우대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등 외려 일방적인 보복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 우리 국민연금이 전범기업들의 수익을 확보케 하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아무래도 아이러니했다. 고로 국민연금의 전범기업 투자를 제한하자고 필자도 당시 칼럼을 쓴 바 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 현시점에서 이렇게 똑같은 목소리를 낸다면 어떨까.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협력해야 할 파트너인 일본이라는 전제로,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망가트리려 하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정치적 반대세력이자 가짜뉴스를 퍼트린다며 호통을 불러일으킬 게다.

현재 한·일간 바람직한 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나빴건 좋아지건 간에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과거 우리가 일제에 의해 당했던 가혹한 수탈의 역사다. 시간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고 환경이 변화한다고 해서 절대 희석돼선 안 될 뼈저리게 통찰해야 할 우리의 과거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은 일본기업(전범기업)에 강제동원됐다.

일본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수물자 생산을 위한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공포했다. 1942년 ‘조선인 내지이입 알선 요강’을 제정·실시해 한반도 각 지역에서 관(官) 알선을 통해 인력을 모집했고, 1944년 10월경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일반 한국인에 대한 징용을 실시했다.

2012년에 국무총리 소속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가 조사·발표한 바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을 강제동원한 전력이 있는 일본기업(전범기업)은 총 299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 의하면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해 동원한 조선인으로서 일본기업이 동원과정 및 강제노동에 관여한 피해 인원은 755만4355명이다. 이들은 전범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산, 건설공사, 군수공장, 금속광산, 농장, 토목공사장 등에 끌려갔고 심지어 일하다 사망하는 등 혹독한 노동 착취를 당했다.

잊어서는 안 될 ‘일제 만행’에 의한 처절한 아픔이자 분노의 역사다.

일본 전범기업들은 중국 등 다른 나라와 달리 강제동원됐던 한국인에게 공식 사과 혹은 손해배상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가관인 것은 작금의 우리나라 정부가 일체 문제 삼고 있지 않다는 것. 오히려 일본 측을 도와주지 못해서 안달인 모양새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지난달 한일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일본 총리는 강제동원을 비롯한 역사 문제에 대해 어떠한 사과나 유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제3자 변제 방식’이라는 정말 놀라운 해법을 내놨다.

일본 전범기업 대신에 국내 기업들의 출연금을 모아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통해 배상금을 변제하는 방식이다. 우리 스스로 대법원의 판결을 무력화시켜 협상을 종료시킴은 물론, 일본의 강제동원 범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이다. 일본 전범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이다.

이러한 ‘‘제3자 변제’에 대해 생존 피해자들은 “금방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돈은 안 받겠다”며 일제강제동원지원재단에 내용증명까지 발송하며 결코 수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은 꿈쩍도 안 하고 있는데 3년 만에 일본을 전략물자 수출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로 복원했다. 지난 2019년 일본 측의 일방적 수출 규제에 맞대응해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지 3년 7개월여 만이다.

간이고 쓸개고 모두 내줄 태세로 저자세 굴욕·굴종적 외교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우리도 일본에게 얻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오직 맹목적으로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 만을 기대할 뿐이다. 일방적인 구애로 미래를 구걸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편,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 기간에 맞춰 보도된 미국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 내용이 화제다.

미 WP 인터뷰에서 윤 대통령은 “Europe has experienced several wars for the past 100 years and despite that, warring countries have found ways to cooperate for the future,” he said. “I can’t accept the notion that because of what happened 100 years ago, something is absolutely impossible [to do] and that they [Japanese] must kneel [for forgiveness] because of our history 100 years ago.(유럽은 지난 100년간 수차례 전쟁을 경험하고도 전쟁 당사국끼리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다. 나는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절대 불가능하고,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밝혔다.

인터뷰 기사를 작성한 WP 도쿄/서울지국장 한국계 미셸 예희 리 기자는 윤 대통령의 발언 녹취록도 공개했는데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에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

오역 논란이나 “주어가 없다” 시전도 순삭 시킨, 분명한 대통령의 소신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평범한 국민인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필자의 생각이다. 일본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한국이 대변하는 것도 이상한데, 하물며 우리나라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일제 식민 지배 시기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라는 게 우리 국민이 잘못한 것인가. 이것 또한 면죄부의 각인인가. 갸웃거리게 된다. 무엇보다 일본이 무릎까지 꿇어야 한다고 대체 누가 강요를 하고 있다는 것인가.

응당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해야지 이후 용서나 화해를 입에 담을 수 있다.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가야 한다. 역사적 책임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말마따나 미래지향적으로 용서와 화해를 통한 호혜 평등적인 한·일 관계가 구축돼야 한다면 말이다.

더군다나 100년 전 일이 아니다.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 정부는 한일정상회담이 있었던 지난달 역사 왜곡 주장을 담은 교과서를 승인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징용에서 강제성이 희석되고, ‘독도’는 ‘일본 고유의 영토’, ‘한국이 70년 정도 전부터 불법 점거’라는 내용 등이 추가됐다.

이같이 왜곡·날조된 교과서를 버젓이 뻔뻔하게 펴내는 일본에게 사정해가며 매달리고 있는 꼴이 아닌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방적인 용서를 강요당해야 하는가 곱씹게 된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존중이 없다면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 있다. 당당한 자세로 국가의 이익을 최대한 끌어내야 하는 게 외교다. 지금 일본과 정상적인 외교를 하고 있는가? 일제로부터 유린 당한 역사를 강제로 마냥 덮고 잊으라는 것인가.

국가 간의 연대와 협력에 있어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며 평등한 위치에서 최대한의 국익을 찾길 바란다.

덧붙여 시각을 넓혀 보면 ‘자국 우선주의’는 한·일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외교의 본질이다. 치열한 외교전 속에서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한다면 글로벌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은 갈수록 심화·확대되고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진영화 양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미·중의 ‘강 대 강’ 대치 속 우리나라는 다자간 균형감 있는 위치를 고수하며 철저한 실리 중심의 외교가 해법이었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에 묶인 철저한 동맹국 강화 구도로 판을 짜다 보니 인접국인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냉랭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제1위 교역대상국인 중국과 제10위 교역국인 러시아가 완전히 등을 돌린다면 국가 경제의 심각한 타격은 물론 안보 마저 위협받을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북한을 컨트롤할 수 있는 중재국을 적대적으로 돌려세워 스스로 걷어차 버리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해소되지 않고 갈수록 극에 달할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하다.

갈려진 땅에 전쟁이라는 위협이 국민의 일상을 뒤흔들어서는 안 된다. 북핵, 미사일 위협 속에서 우방국인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주변 국가와의 관계도 소홀치 않은 투트랙으로 압박을 가해야 한다. 스스로 틀에 가두는 이분법적 편협한 국제관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대인관계에서도 굳이 적을 만들지 않는다. 이익이 충돌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특히 지정학적으로 대한민국은 유연하고 균형있는 외교전략으로 각 사안별로 최대한 실익에 따르는 선택을 하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한쪽을 완전히 배척하고 또한, 배척당한 채 제시하는 카드는 분명 한계가 있다.

대한민국은 자주독립국가다. 국가의 존망은 외부에서 찾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찾는 것이다. 종속외교가 아닌 주도적으로 자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한 고도의 다자간 외교전으로 지속가능한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

국내에서 정권 다툼으로 머리 터지게 싸울지언정 타국과의 외교전만큼은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한다. 외교협상 능력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 대한민국 외교가 성공해야 국민도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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