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송파구의 랜드마크인 롯데그룹 롯데월드타워에는 여러 개의 미술을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 롯데물산에서 관리하는 롯데월드타워에는 롯데백화점, 롯데면세점, 롯데마트, 호텔롯데, 롯데시네마 등이 모여 있다. 이곳의 롯데뮤지엄과 롯데갤러리는 매번 새로운 기획으로 이로운 즐거움을 선물한다. 노란색 오리인 러버덕처럼 바람에 물결이 찰랑거리는 석촌호수 위에, 분홍색 곰인 벨리곰처럼 초록색 잔디밭 위의 대형 설치 작품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롯데뮤지엄과 롯데갤러리의 작품들은 투명한 벚꽃처럼 반짝이는 이 건물에서 우리가 더 깊은 사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양한 패션, 뷰티, 식품 매장을 지나서 롯데월드타워 7층에 있는 롯데뮤지엄으로 올라간다. 투명한 엘리베이터나 아슬아슬한 에스컬레이터라는 머신을 이용해 이 공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는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창립자였던 미술 작가 마틴 마르지엘라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벨기에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이자 미술가인 그는 세 번째 개인전 장소로 롯데월드타워 롯데뮤지엄을 선택했다. 마틴 마르지엘라는 지난 1988년 의류와 가방, 향수 등을 생산하는 메종 마르지엘라 브랜드를 설립해 패션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다가, 2008년에 20주년을 기념하는 패션쇼를 끝으로 표표히 은퇴하고 은둔 생활을 이어왔다. 순수 미술 작가로 변신한 그는 2021년 프랑스 파리 라파예트 안티시페이션, 2022년 중국 베이징 엠 우즈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오는 3월 2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개인전의 이름은 ‘마틴 마르지엘라 엣 롯데뮤지엄(Martin Margiela at LOTTE Museum of Art)’. 심플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LG전자의 디지털 사이니지에 투영되는 블랙과 화이트를 강조한 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한 발자국 앞으로 더 걸어가면, 신체의 냄새를 관리해주는 데오드란트의 대형 이미지가 프린트되어 있다. 데오드란트는 인류의 역사에서 등장한 시기가 길지 않다.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등장한 시간이 길지 않은 것처럼. 하지만 이 제품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중심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소비 지향적인 인간에게 필수 아이템 중 하나이며, 산업적으로 중요한 품목이다. 우리가 만든 데오드란트는 다시 우리를 지배하는 게 아닐까.
특정한 형상을 보통의 경우보다 확대해 보여줌으로써 그 존재의 의미를 다시 느끼게 하는 방식의 작품들. 머리카락이 자라는 정수리를 커다란 사진으로 프린트하고, 대형 사이즈의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모양의 설치작품을 지나친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것처럼 보이는 데오드란트가 폭포 옆에 있는 영상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인위적인 것이 뒤섞인 현재의 삶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
일반적인 사이즈의 모발로 얼굴 전체를 덮은 실리콘 두상, 3D 스캔 토르소 시리즈는 미용을 위해 존재하는 물질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준다. 잡지 더미와 소파를 활용한 작품들. 사용하고 버리지만,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 역으로 그런 존재는 머리카락과 손톱으로 대변되는,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 닮았다.
인류세(인류에 의한 지구 기후변화로 만들어진 새로운 지질 시대)를 이야기하는 현재의 우리 문명은 어디에 도달해 있을까. 우리가 제작한 일상용품들은 사용됨으로 우리를 역으로 관리하고 지배하는 존재로 나아가고 있지 않을까. 마르셸 뒤샹의 ‘샘’도 남성용 변기임을 상기할 때,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답변을 내놓아야 할까.
롯데갤러리에서는 영국의 젊은 화가 알피 케인을 만날 수 있다. 오는 2월 12일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의 이름은 ‘고요의 순간(Moments of Calm)’. 1996년생인 알피 케인은 영국 이스트 서섹스 라이 지역의 건물과 풍경, 침대, 꽃, 욕조, 강아지, 테이블, 자회상 등을 부드러운 색감의 물감으로 안정적인 구조로 캔버스 안에 그렸다.
롯데뮤지엄과 롯데갤러리는 같은 층에 있어서, 두 전시를 쇼핑을 하면서 천천히 감상할 수 있다. 알피 케인은 글로벌 미술품 플랫폼인 아트시에서 올해 가장 기대되는 신예 아티스트 1위에 올랐다고 한다. 영국 캠브리지대에서 건축을 전공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지역의 공간과 건축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동물, 오브제에 집중한다. 시적인 은유를 담았다.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지역에서 살아가는 다른 인종의 작가에게서 한국적인 정을 느낄 수도 있었다.
데이비드 호크니를 연상시키는 알피 케인. 전시장의 하얀색 벽면에는 ‘사람들이 내 작품의 공간들에서 실제 거주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길 원하지만 동시에 이 공간들은 초현실적으로 무형이며 이상화된 세계이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잠시나마 현실을 대신하며 일상으로부터의 정신적 탈출구’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그의 그림에서 느껴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찾은 토끼굴 입구처럼, 또는 다른 시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포털처럼.
최근에 읽은 책 ‘메를로 퐁티 현상학과 예술세계’에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미술사학자인 전영백 교수(홍익대 예술학과)는 이 책의 한 챕터에서 ‘회화는 말 없는 사유이고 철학은 말하는 사유’라고 썼다. ‘존재의 창조에 고심할 것인가, 존재를 사유하는 데 관심을 둘 것인가’라는 고민. 인류가 지구에서 보다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사유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
(CNB뉴스=손정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