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월에 박힌 강렬한 존재감
시각과 인식의 연계에 물음표
女작가들이 던진 질문은 뭘까
모이지 말고 움직임도 줄이고 마스크 없이는 대화도 금해야 하는 ‘자제의 시대’. 출타는 왠지 눈치 보입니다. 그래서 CNB가 대신 갑니다. 재밌고 새롭고 어쨌든 신선한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발과 눈과 손과 귀에 담은 모든 것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3월 8일 여성의 날’에 즈음해 여성 작가들의 향연인 ‘롯데백화점 리조이스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편집자주>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됐다. 1975년 UN이 공식적으로 날짜(3월 8일)를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내에서는 1985년부터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한국 여성대회’를 열기 시작해, 올해로 38회째를 맞았다.
이런 가운데 롯데백화점은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전국 5개 지점에서 ‘REJOICE(리조이스)’를 공통 테마로 기획한 전시를 대대적으로 열고 있다. 총 40여명의 여성작가가 참여했으며, 다양하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전시 기간은 각 지점마다 상이하며 최대 5월까지 이어진다.
여러 유통기업 중 유독 롯데가 여성을 테마로 삼은 것은 창업 뿌리와 연관이 있다. 롯데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 회장은 괴테의 세계적인 명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사명을 가져와 70여년전 롯데(lotte)를 창업했다. ‘샤롯데’는 소설을 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만인의 연인’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여성과 사랑, 자유를 꿈꾸는 기업이 ‘롯데’인 셈이다.
샤롯데의 꿈, 눈앞에 펼쳐지다
기자는 지난 8일 여성의 날에 롯데백화점 본점을 찾았다. 가장 먼저 둘러본 곳은 2020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사진작가 정희승의 ‘Still Life’ 전이 열리고 있는 본점 에비뉴엘.
일반적인 전시회와는 작품 배치가 다르다. 통상 전시회라고 하면 흰색 벽면에 작품을 전시해놓고 콘셉트에 맞춰 일괄적으로 수평 배치를 해놓는 식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백화점 지하 2층부터 지상 4층까지 매장 사이사이 벽면(아트월)을 활용해 작품을 전시해놨다.
때문에 다소 익숙지 않고 어색한 느낌이 들 수 있다. 관람객뿐만 아니라 작가 역시 색다름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전시 경력 중 최초로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화이트큐브형 전시실을 벗어났다는 설명이 존재하는 걸 보니 말이다.
작품을 보기 위해 곳곳을 찾아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재미도 쏠쏠하다. 여유롭게 산책한다는 느낌으로 발길을 내딛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 앞에 와 있다.
Still Life 전은 사진을 통해 시각과 인식의 관계를 연구하는 정희승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보여준다. 작가 주변의 여러 사물이나 인물을 촬영해온 사진들인데, 그 대상의 본래 의미와 다르게 제시, 배치하여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관람객은 미술품과 사진 등을 볼 때 제목과 해석, 작가의 의도 등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작품 설명이 따로 없으면 팸플릿을 찾고, 그마저 없으면 검색을 해보기 일쑤다. 그러나 정희승 작가의 사진들은 특정 주제로 정의하기 힘들다.
대표작 ‘Orb(구)’를 비롯해 ‘입을 닥치시오’, ‘뿔과 무화과’, ‘이른봄’ 등 주요 작품 23점 등을 보고 있노라면, 통일성과 연속성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신체의 일부, 풍경, 사물 등이 담긴 그의 사진들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주제가 어떤 것인지 알아내기 힘들다.
의도를 알아내기 힘든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작가 역시 자발적이고 무계획적인 작업 방식에 의해 만들어졌고, 개념적 프레임을 갖고 있지 않은 작품이라고 설명하기 때문. 정 작가의 작업노트에 따르면 “사진(이미지)은 감상자에게 심리적인 점화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의도와 논리보다는 우발성과 지속적인 관찰에 의존할 때 사진에 힘이 있다”라고 말한다. ‘명확하게 규정될 수 없는 상태들’에 대한 이미지를 통해 감상자의 내부를 살펴보라는 뜻이다.
‘감상자가 직접 사물의 새로운 개념을 정의해보라’는 의미 아닐까. 백화점 곳곳에서 마주친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들은 관객들을 향해 저마다 자신의 내면을 탐색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하다.
아트월 메운 여성 작가들의 메시지
롯데백화점 본관 5~6층에는 ‘Rising Names’라는 콘셉트로 김찬송, 유재연, 장수지, 정지윤, 정희기 등 여성 작가 5인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 역시 매장 사이사이 아트월을 이용해 작품을 배치했다. 백화점 벽면에 있어서 이목을 집중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은 접어두자.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존재감이 강렬해서 시선이 머물 수밖에 없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유년의 기억이나 정서적 불안을 담아냈다는 점, 정착하지 못한 삶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작은 사이즈로 그려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6층 아트월에 전시된 김찬송 작가의 유화는 ‘전체’보다는 ‘부분’을 강조한 느낌이다. 신체의 전부를 그리지 않고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멀리서 바라본 풍경보다는 풍경 안의 작은 부분을 집중한다. 다소 투박해 보일 수 있는 붓 터치는 작품의 질감을 생생히 표현한다. ‘파도’와 ‘산책자’ 등의 작품을 보면 기존의 물질 안에 들어온 새로운 것들이 어우러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듯한 느낌이다.
정지윤 작가의 작품 대부분은 사물보다 인물에 집중했다. 주로 수집한 사진에 드러나는 감각적 특성들을 포착해 유화물감으로 표현했다. 무채색으로 그렸기 때문에 서늘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만큼은 따뜻한 느낌이다.
유재연 작가의 작품에는 유독 ‘자연적 요소’가 많이 나왔다. 달과 지구, 별, 행성, 야경 등에 집중한 모습이다. 캔버스뿐 아니라 자작나무 판넬 위에 작품을 그려 색감도 더욱 색다르다. 형형색색의 작품은 유쾌한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장수지 작가는 ‘소녀’라는 작품을 통해 자화상을 그려냈다. 미성숙하면서도 이상적인 모습을 한 소녀를 표현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설명이다. 작품을 통해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에서 벗어나 과거를 지향한다는 의미. 어떻게 보면 여성의 날에 가장 어울리는 작품 아닐까 싶었다.
정희기 작가의 작품은 섬유(천)를 매체로 했다. 자수 예술을 기반으로 회화, 설치, 조각, 퍼포먼스 등을 표현하고 있으며, 귀엽고 아기자기한 인상을 자아낸다. 마치 따뜻하고 시적인 감성이 담긴 느낌이다.
전시 수익금 일부는 소외이웃에게
롯데백화점은 해당 전시회를 통해 고객에게 최상의 경험을 제공한다는 목표를 밝혔다. 유동 고객이 많고 고객층이 다양한 만큼 수준 높은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백화점만의 차별화된 프리미엄을 경험하도록 한다는 전략이다.
또한, 이번 리조이스 전시를 통해 나눔의 가치를 실현한다고 밝혔다. 전시 작품 판매 수익금의 1%는 롯데쇼핑의 ‘리조이스 캠페인’과 ‘해당 작가’의 이름으로 소외된 이웃에게 기부된다. 1% 기부는 기업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일임과 동시에, 이번 전시가 사회공헌 캠페인인 ‘리조이스’의 이름을 달고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정준호 롯데백화점 대표는 “롯데 갤러리의 작품을 백화점에서 경험할 수 있는 프리미엄 콘텐츠로 성장시켜 나갈 것”이라며 “사회공헌 캠페인인 리조이스를 모티브로 한 리조이스 전(展)’이 고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얻고, 미술감상과 구매, 나눔까지 이어지는 뜻깊은 경험으로 기억되길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CNB=김수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