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판단의 근거되는 ‘금감원 공시’
가짜서류로 공시 냈는데도 ‘나몰라’
사기행각에 상장사·투자자 큰 피해
진위 판단할 검증 시스템 서둘러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한 대규모 금융사기 사건이 발생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금감원에 허위로 자료를 제출해도 별다른 검증 절차가 없다는 점을 악용해 ‘가짜 공시’를 내는 수법으로 투자자를 유혹, 수십억원을 챙긴 신종 사기라는 점에서 투자자 주의는 물론 공시제도 강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현재 주범 정모씨를 지명수배해 추적하고 있다. CNB가 사건 전말을 단독 취재했다. (CNB=도기천 기자)
3일 피해자들에 따르면, 사건의 시작은 2019년 12월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모씨(수배 중)는 피해자들에게 “견실한 상장법인을 인수하려고 조합(다온프라이빗1호)을 만들어 투자금을 유치하고 있다”며 접근했다. 몇몇 법인과 개인이 이미 수백억원을 출자한 상태인데, 일부 부족자금을 펀딩하고 있다는 것.
이후 정씨는 피해자들에게 180억원이 들어있는 다온프라이빗1호조합(이하 조합) 명의의 은행 통장과 100억원이 명시된 본인 명의 잔고증명서를 보여줬다.
또 전략적투자자(SI)로 A사가 함께하고 있다고 홍보했다. A사는 반도체 부품 및 2차전지 음극재 개발·제조사다. 현대차 등에 전기차 배터리 부품을 납품하며 매년 300억원 안팎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튼실한 기업으로 알려진 곳이다.
정씨 측은 “주식 및 현금으로 투자 원금을 보장해주고 투자금의 50%를 수익으로 돌려주겠다”고 유혹했다. 이에 피해자들은 20억원을 조합통장에 입금했다.
하지만 얼마 뒤 정씨 측은 상장사 인수에 실패했다면서 조만간 다른 상장법인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에 투자자(피해자)들이 자금 이탈을 우려하자 잔고 200억원이 들어있는 조합통장 사본을 보여주면서 안심시켰다.
이후 정씨 측은 지난해 2월 19일 코스닥 상장사인 제이엠아이를 인수하는 주식양수도계약을 체결한다. 총 인수금액은 235억원이었고, 계약금(10%) 23억 5천만원은 조합통장에서 지출했다. 1993년 설립된 제이엠아이는 마이크로소프트(MS)의 소프트웨어를 국내서 복제 생산하는 업체다.
며칠 뒤 정씨 측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통해 제이엠아이 인수 사실(주식등의 대량보유상황보고)과 함께 조합자산이 60억원이고 최대출자자가 ㈜토마홀딩스임을 알렸다.
그리고는 투자자들에게 전자공시 내용과 주식매매계약서 등을 보여주며 “여전히 A사가 함께하고 있고 조합 자산이 튼실하다”고 주장했다. 정씨 측은 투자자들에게 최대 출자자인 ㈜토마홀딩스가 투자원금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확인서까지 써줬다. 이에 투자자들은 수십억원을 조합통장에 추가로 입금했다.
농락당한 상장사들, 개미들만 피눈물
하지만 정씨 측은 인수 잔금을 납입기한까지 마련하지 못했고, 결국 인수계약은 파기됐다. 제이엠아이 측은 작년 3월 26일 “양수인의 계약불이행(잔금 미납)에 따라 계약을 해제한다”고 공시했다.
이에 투자자들은 출자금의 즉각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정씨 측은 118억원이 들어있는 조합통장 사본, 조합자산(60억원) 확인서 등을 제시하며 제이엠아이 측과 재협상 중이라며 달랬다. 또한 코스닥 상장사인 바른테크놀로지가 제이엠아이 인수에 108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더이상 정씨 측을 신뢰할 수 없게 된 투자자들은 조합장을 추궁했고, 이 과정에서 조합통장이 위조됐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통장·잔고증명서 등은 첫 투자금을 유치할 당시부터 조작되었으며,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중간중간 제시한 각종 서류들도 대부분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조합통장의 실제 잔액은 수십만원에 불과했으며, 조합의 최대 출자자라는 ㈜토마홀딩스는 한푼도 출자한 사실이 없었다.
현재 정씨는 조합자금 수십억원을 횡령해 잠적한 상태며, 검찰은 작년 7월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정씨를 추적 중이다. 정씨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횡령 및 사기), 사문서 위조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번 사건의 피해 금액은 드러난 것만 56억원에 이른다. 법인 4곳과 개인출자자 15명이 피해자 명단에 올라있다.
제이엠아이 주주들 또한 주가가 출렁이면서 피해를 봤다. 정씨 측의 제이엠아이 인수 추진이 알려지면서 1300원 안팎이었던 주가가 2배 이상 치솟았고, 계약이 무산되자 다시 주저앉는 등 롤러코스트를 탔다. 정씨 측이 조작한 금감원 공시를 믿고 추격매수에 나선 개미들은 상당한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첨단위조기술 앞에 은행·금융당국 ‘무방비’
특히 이번 사건이 주목받는 이유는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의 허점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정씨 측이 조합을 통해 제이엠아이와 인수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을 입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씨 측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각종 서류는 대부분 가짜(위조)였다. 정씨 측은 조합자산을 60억원으로 거짓 공시한 뒤 이를 근거로 투자금(인수잔금)을 유치했다.
현행 제도에서는 이 과정에 금감원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금감원 공시총괄팀 관계자는 CNB에 “상장사의 지분을 5%이상 인수하는 개인이나 기업은 공시의무가 있으며, 이때 보유수량, 취득목적, 주식매매계약서, 결제내역 등을 금감원에 제출해야 한다”며 “하지만 자료가 위조됐다면 진위 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사법당국의 수사 등으로 추후에 허위공시 혐의가 발견되면 공시 주체에 대해 행정조치 등 제재를 가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공시가 나가기 전에 제출된 서류를 검증하는 시스템은 없다는 얘기다.
이번 사건의 한 피해자는 CNB에 “금감원이 정씨 측이 제출한 조합통장의 진위 여부만 조회했더라도 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통장명의자 본인 외에는 거래내역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도 이번 사기에 활용됐다. 시중은행들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의거, 제3자에게는 거래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실제 이번 사건의 피해자들은 정씨 측이 제출한 통장사본과 잔고내역서 등의 진위 여부를 해당은행에 문의했지만 거부당했다고 한다.
법조계 관계자는 CNB에 “은행들이 금융실명제에 대해 너무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측면이 있다. 제3자에게 통장주의 잔액을 알려주는 것은 당연히 법에 위배되지만, 위조 여부에 대한 판단조차 거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이번 사건은 첨단 위조기술에다 금감원 공시제도, 금융실명 거래제도 등을 악용한 신종 금융범죄다. 하지만 이를 막아야할 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다.
자산관리기관의 한 전문가는 CNB에 “진화하는 범죄 수법을 현행 법·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다 보니 이런 기망행위(사기)가 가능했던 것”이라며 “금융사기는 인지되는 순간 이미 돈이 사라진 경우가 대부분이라 피해 예방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현행 제도를 손볼 필요가 있다. 금감원 공시의 경우, 관련 서류를 제출할때 공인회계사의 날인을 받도록 의무화한다면 최소한의 안전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