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낙하산 천국’ 오명 벗었는데
정치권, ‘이익공유제’로 다시 통제
은행들, 금피아 데쟈뷰에 좌불안석
규제보다 소통·협력으로 답 찾아야
여권에서 추진 중인 이익공유제가 과거 관치금융의 악몽을 되살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비교적 손대기 쉬운 분야가 금융권이다 보니, 이 제도를 빌미로 외풍이 불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관치’ 꼬리표를 떼고 ‘이익을 나눈다’는 본래 취지에만 집중할 방법은 없는걸까. (CNB=도기천 기자)
이익공유제는 정치권에서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양극화 극복을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지난 1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코로나로 많은 이득을 얻은 계층과 업종이 이익을 기여해 한쪽을 돕는 방식을 논의해야 한다”며 불씨를 당겼다.
개념은 2011년 당시 정운찬 초대 동반성장위원장이 추진한 ‘초과이익공유제’와 비슷하다. 대기업이 이익 목표액을 초과 달성하면 초과 이익의 일부를 협력업체에 나눠주자는 것으로, 국내기업 중에서는 포스코가 2004년 처음 도입했다.
지금의 민주당발(發) 이익공유제는 자발적인 기부와 정부 운용기금 일부를 합쳐 상생기금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민주당 포스트코로나 불평등 해소 태스크포스(TF)’는 양경숙 의원을 중심으로 이런 내용의 법 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
정부는 ‘자발성이 먼저’라는 점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나섰다가 자칫 ‘관 주도’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 다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7일 세계경제포럼(WEF)이 주최한 ‘2021 다보스 어젠다 한국정상 특별연설’에서 “이익공유제가 감염병 재난을 이겨내는 포용적 정책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처럼 정치권이 ‘자발성’을 내세우고 있지만 기업들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좀 다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익 산정의 기준이 불명확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에서 발생한 이익인지, 제품 경쟁력과 트렌드 변화에 따른 이익인지 구분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대표적인 코로나 수혜업종으로 꼽히는 게임업계의 한 관계자는 CNB에 “언론이 게임산업을 코로나 수혜주라고 말하는데, 과장된 측면이 있다. 게임은 코로나 이전부터도 비대면 산업에 속하는 분야였다”며 “현 상황에서 이익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익을 나누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했다.
상생과 규제, 동전의 양면
특히 금융사들은 이익공유제를 구실로 관치금융의 흑역사가 부활할까봐 염려하고 있다. 자발적인 참여로 기금을 마련한다고는하지만 정치권 외풍에 가장 취약한 곳이 금융권이라는 점에서다.
실제 이익공유제 논란이 시작된 이후 민주당 일각에서 은행들을 압박하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다.
홍익표 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19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현재 코로나19 상황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업종이 금융업”이라며 “금리 인하, 이자 납부 일시 중단 등이 필요하고, 한시적으로 특별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은행권이 코로나 반사이익을 본 만큼 서민에게 도움(이익공유)을 주자는 얘기다.
홍 정책위의장은 21일에도 외환위기 당시 투입된 160조원의 공적자금을 언급하며 “160조원은 국민의 혈세였다. 이제 금융권의 역할로 한번 되돌릴 때”라고 강조했다.
여당은 서민금융기금을 크게 늘리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서민의 금융생활 지원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현재 3550억원 정도인 서민금융 재원을 5000억원 규모로 늘릴 계획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은행들은 최소 1000억원 이상을 출연해야 한다.
이익공유제에 있어 금융권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부금 부담 때문만은 아니다.
주요 시중은행들은 부동산 활황에 따른 주택담보대출 급증, 생활고·경영난에 따른 자금 수요 등이 겹쳐 사상 최대 이익을 내고 있어 사실 갹출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다. 지난해 3분기까지 누적 실적만 봐도, KB금융지주(2조8779억원)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3.5%, 신한금융지주(2조9502억원)는 1.9%, 하나금융지주(2조161억원)는 3.2%, 농협금융지주(1조4608억원)는 4.8% 불어났다. 모두 역대 최대 기록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점이 과거 흑역사를 되살리는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지주사의 한 관계자는 CNB에 “기금 조성이 급한 정치권으로서는 은행들 실적이 이익공유를 강요할 명분이 될 수 있다”며 “이익공유가 단순 1회성이 아니라 장기적인 통제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염려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대급 실적이 되레 빌미 됐나
이같은 은행권의 우려는 과거 외풍에 시달렸던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됐다.
박근혜 정권 때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회) 논란으로 홍역을 치른 우리은행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서금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7년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탈락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금융권 서강대(박근혜의 모교) 동문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이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여권과 서금회는 금융사 낙하산 인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광구 당시 행장이 서금회 출신이었으며, 사외이사 선임 때마다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KB금융은 2014년 KB사태 때 정치권과의 금피아(금융관료+마피아) 논란으로 몸살을 앓았다. 임영록 당시 KB금융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 간의 ‘주 전산기 교체’를 둘러싼 내홍에서 비롯된 이 사건은 금융당국의 경징계→중징계→징계불복→직무정지→이사회 해임결정으로 이어지며 100일 넘게 경영공백을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임영록 회장은 물론 KB를 제재한 당시 신제윤 금융위원장, 최수현 금융감독원장까지 외압 논란에 휩싸였다.
기업은행은 정부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국책은행이라는 점에서 낙하산 인사가 끊이지 않았다. 기업은행은 행장추천위원회(행추위)를 통해 은행장을 선출하는 시중은행들과 달리, 금융위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사실상 정부가 인사권을 행사하다보니 60년 역사에서 연임에 성공한 행장은 정우찬 전 행장(4~5대, 1967~1974년)과 고 강권석 전 행장(20~21대, 2004~2007년) 두 명에 불과하다. 노조가 행장 선임 때마다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것도 이 때문이다.
NH농협금융은 2012년 출범 후 4명 회장 가운데 3명(신충식, 신동규, 임종룡)은 임기를 못채우고 떠났다. 최근 내부 출신 손병환 회장이 취임하면서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2016년 당시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이 금융당국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지분을 보유한 금융회사 27군데의 임원 255명 중 97명(약40%)이 박근혜 정권이 내리꽂은 낙하산들이었다.
이런 진통 끝에 금융권이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지배구조 개혁에 나선 것은 2019년을 전후해서다. 정부와 국회가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을 추진하자 금융지주사들은 이에 부응해 인사 시스템 투명성 강화 등 혁신에 나섰고 이제 겨우 외풍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CNB에 “낙하산·외압이라는 긴 터널에서 벗어나 자율경영체제가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갑자기 정치권에서 통제법안(이자제한 등 이익공유제)을 만든다고 하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며 “수익을 코로나로 어려운 계층에게 나누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민간기업인 은행의 자율성 또한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평론가 구병두 전 건국대 교수는 CNB에 “정치권이 금융정책은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정책적 측면에서 일정부분 통제하면서도, 인사와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시그널을 줘야 한다. 그래야 이익공유라는 본연의 취지를 살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