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투자 보따리’ 사라진 재계 신년사
전경련·경총 등 ‘규제개혁’ 목소리 높여
“규제 안풀면 투자 안한다” 엄포로 읽혀
코로나19의 거침없는 확산세로 주요 대기업들이 신년행사를 영상·이메일로 대체하고 있으며, 신년메시지도 ‘고객 중심 경영’을 강조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반면 대한상의·경총·전경련 등 재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 수장들은 이례적으로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어 주목된다. 이런 흐름을 두고 재벌개혁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는 정부·여당에 대한 재계의 ‘투트랩’ 대응전략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CNB=도기천 기자)
그룹총수들, 역대급 ‘차분한 새해’
삼성전자와 현대차그룹, LG와 SK 등 주요 대기업들은 본사 강당 등에 수백명씩 모여 진행했던 시무식을 올해는 온라인 행사로 대체했다. 정부의 집합금지 방역 수칙에 따른 조치다. 과거 신년행사의 단골메뉴였던 ‘대규모 투자계획 선포’도 올해는 찾아보기 힘들다.
작년 연초에는 위기를 강조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성장전략이 언급됐었다. 실례로 삼성그룹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작년 첫 업무일인 1월 2일 직접 화성사업장 내 반도체 연구소를 찾아 메모리 반도체에 이어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도 작년 연초에 5년간 총100조원 이상을 투자하는 ‘FCEV(수소차) 비전 2030’의 구체적 플랜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신년사에서 ‘글로벌’ ‘성장’ ‘투자’ 같은 단어보다 ‘고객 중심’ ‘기업의 사회적 책임’ 등이 주로 언급됐다.
정의선 회장은 “고객 존중의 첫걸음인 품질과 안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품질과 안전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완벽함을 추구하자”고 강조했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LG가 나아갈 방향은 고객”이라며 “더 많은 고객에게 감동을 확산하면서 팬층을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효성그룹 조현준 회장은 “가격이 아닌 차별적 가치를 제공하는 혁신의 브랜드라는 굳은 믿음을 고객에게 심어줘야 한다”고 말했고, 허태수 GS그룹 회장은 “고객의 변화와 필요에서 모든 사업이 시작된다는 고객 중심 사고를 확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도 “철저히 ‘고객 중심’의 초심으로 돌아가 고객의 변화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재계의 화두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자는 한다는 주문도 잇따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사회와 공감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새로운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때”라며 “SK의 역량과 자산을 활용해 당장 실행 가능한 부분부터 시작해보자”고 제안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ESG 경영을 강화해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특히 글로벌 신재생에너지 분야의 리더로서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탄소 제로’ 시대를 선도하자”고 주문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아예 신년사를 내지 않았다. 이 부회장을 대신해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은 “변화의 물결 속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올해는 변화에 대응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원년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중동’ 의미는 불만 드러낸 것?
이처럼 대부분 총수들이 작년 정초와 달리 정중동(靜中動)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를 대표하는 주요 경제단체장들은 총수들과 달리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박용만(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법·제도 개혁을 촉구했다. 박 회장은 “경제·사회가 성숙하기 위해선 법으로 규제하고 강제하기보다 자율적인 규범이 작동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손경식(CJ그룹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 역시 규제완화를 촉구했다. 손 회장은 “기업을 제약하는 법안이 무더기로 입법화됐다”면서 “새해에는 민간 경제주체가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장애가 되는 규제는 대폭 완화하고, 기업 세제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창수(GS그룹 명예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 또한 “정부는 기업에 족쇄를 채우는 규제는 거두고, 더 많은 기업인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재계를 대표하는 단체의 수장들이 이처럼 일제히 정부·여당의 경제입법에 반발하고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과거 신년메시지는 주로 글로벌 환경 변화와 위기극복 등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강온 양면 작전…결론은 ‘규제완화’
이런 분위기는 최근 국회를 통과한 상법과 공정거래법, 노동조합법 개정안에 대한 불만으로 읽힌다.
개정 상법에서는 감사위원 분리선임 제도가 신설됐고, 공정거래법에서는 내부거래규제 대상이 대폭 확대됐다. 또 노조법 개정안에서는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직접적 형사처벌 규정이 추가됐다. 경영주 입장에서 이는 모두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법안들이다. 이에 경총과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등 4개 경제단체는 지난 3일 보완 입법을 국회에 요청했다.
더 나아가 향후 예상되는 기업규제 입법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란 해석도 나온다.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집단소송 도입과 징벌적 손해배상제 강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등 추가적 규제 입법을 추진 중이다.
집단소송제는 일정한 수의 피해자들이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 승소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나머지 피해자들은 별도 소송 없이 동일한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반사회적 행위를 한 기업은 실제 소비자가 입은 피해액보다 더 많이 배상하라는게 요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기업의 잘못으로 중대재해 발생시 사업주를 형사처벌하는 법안으로, 오너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경총과 대한상의, 전경련, 한국무역협회 등 10개 경제단체는 지난 6일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처벌 기준 완화 등 보완을 촉구했다.
특히 재계는 오는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재벌개혁 이슈를 부각시킬 가능성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박용만 회장이 최근 거듭 정치권을 향해 “정치와 경제 이슈를 분명히 구분해달라”고 요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앞뒤 흐름으로 볼 때, 주요대기업 총수들이 신년사에서 대규모 투자 얘기를 꺼내지 않고 경제단체장들이 일제히 규제완화를 요구한 것은 일정한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한마디로 문재인 정부와 정치권에 “규제를 풀어줘야 투자를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날린 셈이다.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CNB에 “매년 정초에 고용창출과 매머드급 투자계획 등이 언급되거나 발표됐는데 올해는 분위기가 차분하다”며 “코로나 영향도 있겠지만 최근 정치권의 일방적인 입법 활동 등에 우회적으로 견제구를 던진 의미도 있다”고 분석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