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미술계를 벗어나 영국의 외진 농가에서 지내며 그저 걷고, 읽고, 소설을 쓰려고 계획했던 루시 R. 리파드가 그곳에서 걷다 우연히 고대 유적을 마주친 후, 다시 현대미술로 돌아와 쓴 책이다. 루시 R. 리파드는 전시, 비평, 예술운동에서 다양한 행보를 이어온 전시기획자이자 미술비평가다. 특히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대지미술, 과정미술, 페미니즘에 대한 글과 전시를 통해 1960년대와 1970년대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소개하고 담론의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미국의 비평가 중 한 명이다.
저자가 마치 모든 것이 또 다른 모든 것으로 이어지는 ‘스파이더 우먼’의 손아귀에 든 것 같았다고 표현했듯이, 책은 머나먼 과거로 떠나 세계 전역에 존재하는 방대한 시공간의 선사 시대 이미지를 다룬다. 그리고 선사 시대 이미지에 관심을 갖고 작업하는 현대미술 작가들 중 과거의 형식이 현재의 언어가 되도록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예술이 다시 쓸모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과거의 시간대를 돌아보고, 예술이 삶과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예술·정치·종교가 가진 사회적 기능을 되살려보고자 한다.
책에 수록된 13장의 컬러 사진을 비롯해 약 320장에 달하는 흑백 사진은 고대와 현대, 자연과 문화, 선사 시대 미술과 현대미술이 연속성을 갖고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들이 서로 겹쳐지며 이뤄내는 의미의 층을 따라가는 시각적 즐거움을 안긴다. 일부 리파드가 직접 찍은 사진을 포함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부터 스톤헨지, 에이브버리, 차코 캐니언, 나스카 라인, 세르네 아바스 자이언트 등에 이르는 다양한 고대 문화 유적지의 사진들은 선사 시대 이미지로 종횡무진 떠나는 여정의 길잡이가 돼준다.
루시 R. 리파드 지음, 윤형민 옮김 / 2만 8000원 / 현실문화A 펴냄 / 3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