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욱 작가의 '만일의 약속' (사진=선명규 기자)
올 가을 미술계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분단과 경계다. 9월 개막해 진행 중인 부산비엔날레와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각각 ‘비록 떨어져 있어도(Divided We Stand)’와 '상상된 경계들‘(Imagined Borders)’. 이념의 대립이나 물리적 분단으로 인한 환멸, 소외와 그리움 등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복잡한 감정들을 노래한다. 경계 넘어 있던 북한의 미술 작품도 이번 비엔날레를 찾았다. 남북 해빙 무드가 가속화되는 지금 보면 더욱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 많다.
지난달 부산비엔날레를 취재하면서 특히 두 작품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하나는 천민정 작가의 ‘초코파이 함께 먹어요’. 북한에서 밀거래 될 정도로 인기 높은 한국 제과제품 초코파이 10만개를 활용한 작품이다. 직접 가보지 않았어도 SNS를 통해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초코파이가 둥글고 널따랗게 펼쳐져 있는 사진을. 그 앞에서 두 시간을 머물렀다. 작품을 관찰하고, 사람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행동을 기록했다. 보고, 먹고, 지정된 장소에 봉지를 버리는 과정이 이 작품의 관람절차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도 이 퍼포먼스를 그대로 따라했었다. 함께 먹어서 완성된다는 작품 의도 앞에서 모두가 동일한 행동을 했다. 작품 속 초코파이는 ‘화합’의 매개체다. 남북한에서 어떤 경로로든 유통되는 초코파이에게는 경계가 없다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시간이 임박해 초조한 그때, 또 다른 작품이 자꾸만 발길을 멈춰 세웠다. 낡은 브라운관 TV에서 흘러나오는 가족을 찾는 외침과 애타면서도 지친 눈망울이 발과 눈을 꽁꽁 묶어두었다. 1983년 전파를 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장면. 영상이 전부가 아니었다. 가족의 신상을 있는 대로 적어놓은 설치작품 앞에서는, 전해지는 절박함에 오도카니 서서 다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마네킹)는 자신의 옷에도, 어깨에 멘 광고판에도 정보를 새겨 가족을 찾고 있었다. 지역과 이름은 물론, 서로만이 알아 볼 수 있는 ‘까마귀’, ‘우물’, ‘감나무’, ‘깨묵공장’ 같은 신호도 적혀 있었다. 가족들만이 기억할 최대한의 텍스트다. 그 위에는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고 꼬불꼬불하게 적혀 있었다. 떨어져 있는 이를 향한 그리움이 한 자 한 자 짓눌려 있었다.
두 작품을 보고 든 두 가지 생각. 과자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경계가 이산가족 앞에서는 왜 이리도 굳건한가. 오래된 이 장벽의 균열은 어디서부터 이뤄내야 할까. 그래도 희망은 있는 법. 그 시도를 기대할만한 발언이 최근 나와 귀를 쫑긋 세웠다.
21일 이북도민 체육대회 개회식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약속했다. 핵심은 이산가족을 위한 상설면회소의 조속한 복구, 가족과 연락할 수 있는 화상 상봉이나 영상편지 등의 방법을 북측과 충분히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오래 기다리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균열의 시작일지 사뭇 기대되는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약속의 완성은 이행이다. 아무리 단단한 약조도 실행이 없으면 한낱 공수표다. 앞서 언급한, 가족을 애타게 찾던 두 번째 작품의 제목은 ‘만일의 약속’이다. 기다림이 너무나 오래됐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