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구 노량진의 한 학원에 붙은 추석 연휴 무료특강 홍보물 (사진=연합뉴스 제공)
‘표정은 최대한 담담하게. 적당한 거짓말도 효과 만점. 상대의 질문 의지를 꺾어라’
인터넷을 유랑하다 흥미로운 게시물을 봤다. ‘명절 잔소리 대처 Tip’. 제목에 끌려, 어떤 팁이 있을까 궁금해 눌러봤다. 첫째는 철벽이다. "취직 안하니?"에는 ‘네’라는 단답형으로 일관한다. 무표정까지 더하면 완벽하다. 잔소리의 시작 지점에서 원천봉쇄하는 거다. 다음은 ‘동문서답’형이다. “취업 준비 했니”에 “죽을 준비 했다”로 맞받아친다. 상대를 황당하게 만들어 더 이상의 질문 의지를 꺾는 게 기대효과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법도 있다. 누군가 “애인 있냐” 물으면 “너는 있냐”고 똑같이 되묻는 거다. “토익 만점” 같은 당장 확인 불가능한 거짓말도 도움이 된단다.
심화편도 등장했다. 보다 거칠고 도발적인 반격이다. “공부 잘하니” “취직했니” “애인은 있니” 같은 공격이 들어오면 “노후 준비는 하셨어요” “진급 하셨어요” “집값 많이 올랐어요”를 미사일처럼 쏘아붙여 상대를 녹다운시킨다. 속사포처럼 내뱉어 상대의 혼을 빼는 게 관건.
일련의 게시물들을 보니 역시 ‘TMI’ 시대다 싶었다. 이 무렵 실검 단골 검색어는 차례 지내는 법, 촌수와 호칭 따위. 명절 나는데 필요한 쏠쏠한 정보, 그 이상(Too Much Information)이 유통되는 것은 아닌지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시선을 살짝 트니 다르게 읽혔다. 전쟁 같은 명절에서 살아남기 위한 ‘N포세대’의 방어적 정보 공유라는 해석. 명절 연휴를 앞두고 2~30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러 조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3년간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미혼 남녀들이 명절에 느끼는 가장 큰 부담은 ‘가족에게 듣는 잔소리’다. 수입이나 취직·결혼 여부 같은 무심코 하는 질문이 그들에게는 가시 돋쳐 귀에 박힌다는 뜻이다. 취업포털사이트들의 조사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대학생 65%(잡코리아·알바몬)는 "언제 취업할래"라는 친척의 안부 인사에 “마음이 상한 적 있다”고 답했고, 취업준비생 10명 중 7명은 가족과 명절을 보내는 대신 취업준비에 몰두한다는 조사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연휴 동안 취준생들에게 스터디공간을 제공하는 어학원들의 ‘명절대피소’까지 등장했다. 모두 괜한 말에서 빚어진 현상이다.
김소연 시인은 <한 글자 사전>(마음산책)에 ‘말’을 이렇게 풀었다. “가장 아둔한 말은 누군가를 꾸짖는 말이다. 무섭게 가르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마음은 닫히기 때문이다. (중략) 가장 현명한 말은 그 말을 듣는 자가 듣고 싶어 하던 말일뿐….”
사석에서 한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노파심과 넓은 오지랖은 동의어라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라고 운을 떼면 다음은 안 들어도 좋다고. 선을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무언(無言)하는 편이 낫다는 얘기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