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처럼 생긴 이 건물은 '가파도 인 레지던스'이다. 예술가, 인문학자들이 창작을 하는 공간이다. 주변은 청보리밭이다. 온통 연녹색이다. 작고 조용한 가파도에 변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사진=선명규 기자)
‘이고초려’였다. 가파도로 들어가는 뱃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전날부터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날이 바뀌면서 더욱 거세진 바람은 ‘풍랑주의보’를 발효시킬 만큼 격해져 모든 선박을 묶어 두었다. 제주 남쪽 운진항에서 뜨는 첫 배를 타려고 한림에서 새벽부터 달려왔지만 헛걸음이었다. 휴가 둘째 날 시도한 첫 입도(入島)는 실패로 끝났다.
남은 시간은 이틀. 다음날 아침에도 하늘이 영 꾸무룩했다. 기별 없는 바람은 정처 없이 여기저기서 마구 불어 댔다. 굳이 여객터미널에 전화 걸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결항이구나.” 이쯤 되니 이번 여정에선 못 들어가겠다, 고만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서울로 돌아오던 날. 비운 마음이 전해졌는지 기적처럼 하늘도 개고 바닷길도 열렸다. 성산에서 붉게 솟구치는 해를 등에 업고는, 아침 댓바람부터 득의양양하게 항구로 내달렸다.
고작 4일 일정으로 찾은 제주도였다. 반나절은 들여야 하는 가파도를 일정표에 욱여넣은 이유는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현대카드가 여기서 어떤 모의를 하고 있다는데 영 감이 안 잡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가파도 프로젝트’라는데 단어 조합만으로는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다.
회사 쪽 자료를 보니 내용은 대략 이랬다. 150명 살고 있는 작은 섬(0.84km2)을 자연, 경제, 문화가 어우러진 땅으로 탈바꿈한다. 예술가에게 창작공간을 내줘 문화의 토양을 만들고, 고유의 매력을 개발해 사시사철 관광객이 찾는 섬으로 거듭나게 한다. 편의시설은 기존 건물을 활용해 만들어 환경 훼손을 최소화 한다. 프로젝트에서 생긴 사업은 주민들이 운영하게 해 수익을 돌려준다. 일련의 도모는 자연, 주민, 기업이 운명 공동체로서 프로젝트를 끌고 간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론을 파악하니 경험하고 싶었다. 가파도 선착장에 내려 해안길을 따라 한 바퀴 돌고, 중간에 이 지역 명소인 청보리밭을 훑는 게 일반적인 코스라 했다. 일단 그렇게 따라가 봤다. 앞으로는 여기에 들러야할 장소 세 군데를 추가해도 좋겠다. 프로젝트로 새로 생긴 가파도 터미널(여객선 매표소),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작가 창작 공간, AiR)’, 스낵바이다.
먼저 섬에 내리면 맞는 터미널. 단층에 기다랗게 뻗은 조형미가 ‘힙’한 거리의 카페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무채색이어서 자연의 미관은 흐리지 않는다. 안에선 배를 기다리며 차를 마시고 청보리로 만든 특산품을 살 수 있다. 섬의 절반 가량이라고 하는 ‘노인’ 몇몇이 상품을 소개하고 또 팔고 있다.
연녹색 청보리밭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AIR’은 외관만으로 충분한 볼거리다. 가뜩이나 납작한 섬에서 잠수함의 잠망경처럼 혼자 삐죽 올라와 있다. 그래봤자 아파트 2층 높이인데 무람없이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듯하다. 관광객들은 아찔하고 독특한 이 ‘고층’ 건물 앞에서 셔터 누르는 손이 빨라진다.
‘AIR’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큐레이터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추천한 작가들이 들어와 있다. 외부에 개방된 전시장에는 가파초등학교 학생들과 입주 작가가 만든 ‘가파도의 보물지도’가 있다. 나만 알고 있는 특별한 장소를 마카로 표시해 공유하는 플랫폼이자 작품이다.
섬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 다시 터미널에 다다를 때쯤이면 스낵바가 나타난다. 낮에 가도 좋지만 진가는 밤에 있다. 식당들이 문을 닫은 늦은 밤, 불을 밝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의 담소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랑방’이다.
스낵바에는 가파도 주민 이일순 씨가 있다. 얼마 전까지 바다가 익숙한 해녀였지만, 지금은 능수능란하게 스낵바를 운영하고 있다. 현대카드 쪽 요리사로부터 배운 커피, 스무디 등 음료와 뿔소라버터구이 같은 음식을 척척 만들어 판다. 전직한지 고작 몇 달째인데 솜씨가 좋다. 이 동네 사연을 깊은 내력으로 들려주는 그는 ‘사랑방’의 안주인이다.
몇 개의 건물과 일자리로 프로젝트의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은 시기상조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현재 가파도 프로젝트는 ‘가오픈’ 상태”라며 “계속해서 시설물을 개보수하고 직원들의 테스트를 마치면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섬은 묘하다. 출입을 하늘과 바다에 맡긴다. 그래서 발을 동동 구르게 하는 조급증을 불러일으킨다. 시인 오은은 ‘섬’에 이렇게 썼다. “그 섬에 가고 싶니? 굳이 누굴 찾아갈 필요는 없어 섬은 바로 네가 품고 있는 거니까.” 후에 가파도를 품은 이들에게 이 조용한 섬은 어떤 잔상이 될까. 프로젝트의 결말이 궁금해 스포라도 당하고 싶어졌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