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서귀포시에 속한 가파도는 '키 작은 섬'이다. 해발 20미터가 채 안 된다. 주민은 약 150명 산다. 노인이 절반 가량이다. 이 작고 조용한 섬이 최근 현대카드가 실시하는 '가파도 프로젝트'로 들썩이고 있다. (사진=현대카드)
제주도 서남쪽 운진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작고 조용한 섬 가파도가 나온다. 보통 걸음으로 30~40분이면 섬을 가로지를 수 있고, 주민은 150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 중 절반 가량은 노인이다. 이 차분한 섬이 어쩐 일인지 요즘 들썩이고 있다. 창작공간·편의시설이 들어서면서 예술가와 관광객이 몰려들고, 어업이 주업이던 주민들에게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다. 현대카드와 제주특별자치도가 이 지역 경제와 문화를 깨우기 위해 시도하는 ‘가파도 프로젝트’의 일면이다. CNB가 6년의 준비 끝에 새 옷을 갈아입은 가파도를 찾았다. (CNB=선명규 기자)
150여명 사는 땅에 관광객 수만명 몰려
제주도-현대카드, 예술·일자리 프로젝트
인간·자연 공존하는 ‘문화 섬’으로 거듭나
가파도는 가장 높은 곳이 해발 20미터가 채 안 돼 ‘키 작은 섬’이라 불린다. 멀리서 보면 수평선 위에 접시 하나 엎어 놓은 듯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넓적하게 뻗은 모양새가 가오리를 닮았다고 한다.
면적 0.84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한 작디작은 이곳이 유독 들끓는 시기가 있다. ‘청보리 축제’ 기간이다. 해마다 4~5월쯤 한 달간 행사가 열리는데 배편 구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다. 약 6만 명이 입도(入島)하니 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청보리는 가파도의 대표 특산품이자 관광상품인 것이다.
가파도를 비롯한 많은 섬들이 안고 있는 고민이 여기에 있다. 내륙 지역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져 축제 같은 특정 시기에만 방문객이 몰리는 경향이 있다. 단기간에 사람들이 몰리는 탓에 자연 훼손 우려도 있다. 관광수입도 불균형할 수밖에 없는 상황. 연중 고른 방문객 유입을 위한 방책 마련이 필요했다.
‘가파도 프로젝트’는 바로 여기서 출발했다. 자연 환경은 그대로 보존하면서 새로운 특색을 찾고 다듬어 대외적으로 알리기로 했다. 따라서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해 ‘가파도 터미널’, ‘스낵바’, ‘가파도 하우스’(숙박시설), ‘가파도 레지던스’(작가 창작 공간)를 만들었다.
▲가파도 터미널에서는 청보리 등 이 지역 특산품과 커피 등을 판다. 판매는 이곳 주민이 한다. (사진=선명규 기자)
시설의 유용함도 있겠지만 깔끔한 외관도 관광객 사이에서 인기다. 현대식 디자인에 무채색이어서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단층이어서 시야를 가로막지 않는 특징이 있다. ‘가파도 터미널’ 앞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김장선 씨는 “건물들이 예뻐 사진 찍기에 좋다”며 “요즘 유행하는 ‘인스타 감성’에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실제 인스타그램에 가파도 관련 시설물을 검색하면 게시물 수십 개가 나온다.
가파도 선착장에서 왼쪽 해안선을 따라가다 모퉁이에 다다르면 네모반듯한 회색 건물이 고개를 빼꼼 내민다. 얼핏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디자인 회사나 IT 전문 기업의 사옥처럼 보이기도 한다. 정체는 가까이 가서 문패를 읽어야 확실히 알 수 있다.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gapado artist in residence. AIR).’ 국내외 예술가, 인문학자 등이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전시장, 사무실, 세미나실, 직원숙소, 작가숙소, 작업실이 들어서 있다. 이 중 전시장만 외부인 출입 가능 구역이다. 이곳에선 입주 작가와 주민들이 협업해 완성한 예술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가파도 AIR’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미술관 큐레이터 등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선정한 작가들이 들어와 있다. 설치 예술가 정소영, 미디어작가 양아치, 페루 출신 일리아나 오타 빌도소 등이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창작 활동을 한다.
▲작가들을 위한 창작 공간 '가파도 인 레지던스' 입구(사진 위)와 위에서 본 모습(중간). 그리고 외부인에게 개방된 전시장. (사진=선명규 기자)
해녀, 바리스타 되다
현대카드는 프로젝트에서 파생된 일자리를 현지 주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가파도 주민 이일순 씨는 원래 물질하는 해녀였다. 지금은 ‘스낵바’를 운영한다. 커피, 스무디 같은 음료를 만들고 뿔소라를 구워 판다. 조리법은 현대카드 쪽 요리사에게 배웠다.
4월에 오픈해 운영한 지 세 달째지만 이 씨의 솜씨는 꽤 능숙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커피 기계 다루기부터 계산기를 두드리는 모습까지, 일사천리로 시연했다. 해녀 출신 주인장의 손끝이 제법 야무졌다.
첫 배가 들어오는 아침 9시쯤 문 열어 밤 10시에 닫는 기준이 있지만 잘 지켜지진 않는다. 식당들이 잠든 깊은 밤, 약간의 술로 여행의 흥취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이 씨는 “어떨 땐 주방까지 점령할 정도로 손님이 많다”며 “밤늦게 문 연 곳이 여기 밖에 없으니 매몰차게 내보낼 수는 없다(웃음)”고 했다.
‘스낵바’에서 파는 음료나 음식은 물자 수급이 수월하지 않은 섬치곤 저렴한 편이다. 뿔소라 버터구이가 5000원, 커피 한 잔이 5000원 내외다. 한라산 소주를 잔에 내어 파는 ‘잔술’(2000원)은 병째 주문해 마시기 부담스러운 여성 손님에게 특히 인기라고 한다.
▲스낵바 외관(사진 위)과 스낵바를 운영하는 이일순 씨(사진=선명규 기자)
현대카드 관계자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가파도에 대해 깊이 연구했고, 주민들과 수시로 의견을 나눴다”며 “이제 출발선에 섰을 뿐 더 살기 좋은 섬, 사람들에게 영감을 선물하는 섬으로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