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월드컵경기장 내에 위치한 상암CGV의 마지막 상영일인 17일의 오전 풍경. 장대비가 내리다 잠시 멎은 때다. 이 영화관은 18일 문을 닫았다. (사진=도기천 기자)
“오늘이 마지막이라구요? 아이들과 정말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인데…”
서울월드컵경기장 건물 내에 위치해 있는 ‘상암 CGV’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인근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40대 주부 송성혜 씨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은 17일 마지막 영화를 상영한 뒤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2003년 5월 21일 개관한지 15년 만이다. (CNB=도기천 기자)
‘문화CJ’ 상암 삼각벨트 한축 소실
상암동의 CJ맨과 주민들 “아쉬워”
CGV 있던 자리 ‘메가박스’로 변신
마지막 모습을 담기 위해 왔다는 한 중년의 부부는 “(남편이) 퇴직한 뒤 (부부가) 함께 일주일에 한번 정도 들리고 있다. 바로 앞에 공원이 있어 영화 보고 산책 하는 게 일상이 됐는데 너무 아쉽다”며 “다른 영화관이 들어와도 한동안 어색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분위기는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영화관 입구에서 스마트폰에 ‘CGV’ 간판을 담는 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고,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눈에는 하나같이 아쉬움이 가득해 보였다. 한산한 평일 낮이라 이별의 마음이 더 스산할 것 같았다.
▲상암CGV의 마지막 날인 17일 한 고객이 영화를 고르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상암CGV는 15년전 세계 최초의 ‘시네마 인 스타디움(Cinema in Stadium)’이라는 명성을 얻으며 화려하게 출발했다. 월드컵경기장에 영화관이 들어선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보니 CJ그룹 차원의 기대가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3300여평의 공간에 10개 스크린과 대형 로비, 1800여개의 좌석을 갖췄으며, 아이맥스·4DX 전용관, 고전명작들을 상영하는 아트하우스 등 장르도 다양했다. 지금은 흔한 시설이지만 3-Way 돌비 서라운드 음향, 쾌적한 실내공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삼림욕 향공조 시스템, 순번 발권기 등도 당시로써는 화제를 모았다.
특히 항공기의 퍼스트클래스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한 프리미엄 상영관 ‘골드 클래스’는 큰 인기를 누렸다. 일반 상영관보다 가격이 3~4배 가량 비쌌지만 특별한날 연인들이 찾는 명소로 알려지면서 예약이 넘쳤다.
▲상암CGV의 마지막 날 풍경. 한산한 모습이다. (사진=도기천 기자)
메가박스 공세 예상 못해
하지만 재입찰에서 낙마하면서 이제는 추억이 됐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영상관은 서울시 규정에 따라 15년마다 재계약(재입찰)이 실시된다. 지난달 기존 사업자인 CJ CGV를 비롯해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총 3곳이 경합을 벌인 끝에 32억7500만원을 써낸 메가박스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이는 예정가격이자 최저입찰가인 21억2570만 원보다 무려 54%나 높은 금액이다. CGV는 그동안 연간 6억원 안팎의 임대료를 지불해 왔는데 메가박스는 이보다 5배 이상의 금액을 제시한 것. CGV로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CGV 측은 “공정한 입찰절차에 따라 이뤄진 결과라 할 말이 없다”지만 내심 아쉬움이 커 보인다. 특히 CJ그룹이 오래전부터 서울 마포구 상암동을 ‘문화사업의 거점’으로 점찍어 확장·발전시켜 왔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상암CGV는 인근의 CJ 계열사들과 함께 시너지를 냈었다. CJ E&M 상암동 사옥. (사진=도기천 기자)
CJ그룹은 상암디지털미디어시티(DMC)에 CJ E&M센터와 CJ헬로비전 등 사옥 2개를 갖고 있다. CJ가 상암을 거점으로 택한 이유는 이재현 회장의 ‘문화 CJ’ 선포에 따라 미디어 계열사들 간의 시너지와 통합·확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지난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설립한 미국의 영화제작·배급사 드림웍스에 3500억 원을 투자하면서 ‘문화 CJ’를 세계에 공표한 바 있다. 당시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미래 먹거리’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투자를 강행했다.
이후 한류 열풍을 주도했고, 중국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엔터테인먼트·서비스·유통·식음료 분야에서 후발 기업들의 길을 터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서울시는 상암동을 20여년 전부터 국내 IT·미디어산업의 메카로 조성해 왔다. 그동안 MBC글로벌미디어센터, YTN, SBS프리즘타워, KBS미디어센터, 한국경제신문·TV, 중앙·조선·동아일보의 종합편성채널 방송국 등이 들어섰으며, CJ E&M, LG CNS, LG U+, 한샘 등 대기업 수십여 곳이 둥지를 틀었다.
이처럼 서울시의 미디어산업 조성과 ‘문화 CJ’ 선포가 맞물리며 자연스레 상암이 CJ의 중심이 된 것이다.
▲CJ헬로비전이 입주해 있는 상암동 ‘디지털 드림타워’ 빌딩. 이 빌딩과 함께 CJ E&M 사옥, 월드컵경기장의 CGV가 상암동에서 ‘문화 삼각벨트’를 이뤘지만 이중 CGV는 사라졌다. (사진=도기천 기자)
화려한 등장, 쓸쓸한 퇴장
상암동의 CJ E&M(엔터테인먼트&미디어)센터는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건립한 사옥이다. 2009년 완공과 함께 게임 계열사인 CJ인터넷을 입주시킨데 이어 방송채널사업자 CJ미디어와 영상물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 온라인 음악포털 엠넷미디어, CJ CGV 등이 잇따라 이 건물에 입성했다.
이후 CJ그룹은 온미디어·CJ미디어·CJ인터넷·엠넷미디어·CJ엔터테인먼트 등 미디어 계열 5개사를 합병해 CJ E&M을 출범시켰다. CJ E&M은 방송, 게임, 영화, 음악·공연·온라인 4개 사업 부문을 갖춘 거대 미디어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다른 한축은 케이블TV사업자인 CJ헬로비전이다. 상암동 ‘디지털 드림타워’ 빌딩에 2016년 입주해 E&M센터와 함께 CJ그룹의 문화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다. 디지털 드림타워는 2012년 CJ가 다른 사업자들과의 컨소시엄을 통해 착공한 건물로 CJ헬로비전은 15개 층 가운데 7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
CJ그룹은 한때 상암동에서 민·관 합동으로 문화창조융합센터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 센터는 CJ와 문화체육관광부가 힘을 합쳐 2015년 2월 문을 열었다. 다양한 문화를 융합해 혁신적인 콘텐츠를 생산한다는 목표 하에 문화예술단체의 해외 진출 등을 돕는 역할을 해오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작년 3월 문을 닫았다.
▲상암CGV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관한 직후인 2003년 7월경 한 주민이 월드컵경기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시 4세였던 손에 들린 아이는 어느덧 19살의 청년으로 성장했다. (주민 제공)
이처럼 CJ그룹에게 상암은 양보하기 힘든 땅이다. 이런 배경들로 인해 상암CGV의 퇴장은 그룹 구성원 모두에게 아쉬움을 주고 있다.
CJ E&M의 한 직원은 CNB 기자에게 “월드컵경기장에서 여러 이벤트·공연 등을 진행해 왔는데 그 자리에 CGV가 없다고 생각하니 힘이 빠진다”며 “CJ맨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인근에서 13년째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박모(49)씨는 “상암동은 CGV와 CJ의 사옥들, 방송국들이 어울려 ‘문화촌’ 이미지가 강하다”며 “그 중의 하나인 CGV가 사라지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한편 CGV가 있던 자리는 내부 공사를 거쳐 이르면 7월부터 메가박스 상암점이 들어설 예정이다. 메가박스는 향후 15년간 이곳을 사용하게 된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