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 취임 이후 금리상승세가 뚜렷해지면서 채권시장 자금이 급격히 이탈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하반기 2000선을 돌파한 종합주가지수가 새해 들어 꾸준히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의 금리상승 여파로 채권시장 자금이 주식에 빠른 속도로 유입되고 있으며, 에너지·반도체·화학주가 실적장세를 주도할 것이라는 예상이 쏟아지고 있다. 눈치 빠른 투자자들이 매수에 나서면서 ‘빚내서 주식투자’하는 신용거래가 한달 새 10% 넘게 증가했다. 하지만 美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 강화, 꽁꽁 얼어붙은 내수경기는 주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주식시장은 여전히 ‘신의 영역’일까. (CNB=도기천 기자)
채권시장 빠진 자금 증시로
반도체·에너지 활황세 가속
내수 침체, 주가 상승 발목
CNB가 최근 1년간의 주가 흐름을 분석해보니, 코스피 지수의 최근 특징은 과거처럼 급등락 없이 2100선 안착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여러차례 2000선을 넘은 적이 있지만 대부분 한 달을 넘기기 못했다. 심지어 지난해 9월에는 며칠간 1900선이 붕괴되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 연말에 2000선을 다시 돌파한 뒤 현재까지 꾸준히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대형주를 중심으로 상승폭이 컸다. 대형주에 연동하는 상장지수펀드(ETF) ‘코덱스(KODEX)200’은 6일 종가 기준으로 2개월 전에 비해 7% 넘게 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의 가장 큰 배경으로 미국 금리인상에 따른 채권시장의 하락을 꼽고 있다.
미국 현지 교포사회에서 금융투자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임모(47)씨는 7일 CNB와의 통화에서 “이미 7~8개월 전부터 한국채권시장의 외인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 대형주로 유입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금리정책과 연관이 크다”고 분석했다.
통상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이 하락하게 된다. 가령, 정부가 국채를 100만원의 액면가로 발행시 2%의 발행수익률을 약속하면 사는 사람들은 98만원을 주고 매입해 만기때 까지 들고 있으면 100만원이 된다. 즉 채권가격은 98만원에 형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금리(발행수익률)가 5%로 오르게 되면 마찬가지 원리로 채권가격은 95만원에 형성된다. 채권가격 하락으로 채권시장은 약세장이 된다.
또 다른 측면은 기업의 재무구조와의 연관성이다. 금리가 낮을 때는 기업의 금융비용(이자비용)도 줄어 재무구조가 비교적 튼튼해지지만 금리가 상승하면 빌린 돈에 대한 이자비용도 늘어나게 된다. 그만큼 기업이 부실해질 우려가 있어 발행하는 채권의 가치도 추락하게 된다.
이는 채권형 펀드의 수익률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채권형 펀드의 최근 1년 수익률은 1.3%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이 가시화된 지난해 9월 이후부터 최근 5개월 간의 수익률은 마이너스로 돌아선 상태다.
이에 따른 자금이탈 속도도 가팔라지고 있다. 작년 9월부터 채권형 펀드에서 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해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3개월간 3조4천억원이 빠져나가는 등 국내 채권형 상품에 대한 투자 열기가 급속히 식어가는 양상이다.
▲국내외 채권형 펀드의 설정액이 최근 3개월 새 크게 줄어들었다. (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SK하이닉스 승승장구 “왜”
증권가에서는 이 자금의 상당부분이 주식시장에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에너지·반도체·화학주 등 대형주 중심의 실적 기대감이 반영됐다.
반도체 대장주로 꼽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 4일 시장 추정치를 크게 뛰어넘는 깜짝실적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에 시장 추정치보다 10.6% 많은 9조2208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해 지난 2013년 3분기 이후 처음으로 영업이익 9조원을 넘겼다.
SK하이닉스도 반도체 시황 악화로 2015년말부터 실적 하락세를 보였으나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어진 개선으로 작년 4분기 1조5000억원이 넘는 영업이익과 사상최대 매출을 기록했다. 주가도 신고가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주춤했던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하반기에 급증했기 때문. 지난달 반도체 수출은 스마트폰 탑재용량 증가와 메모리 단가 상승으로 사상 최대인 64억달러의 실적을 거뒀다. 일각에서는 반도체 호황기인 슈퍼사이클에 진입할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의 22%를 차지하는 삼성전자가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S8의 출시(4월 예상)를 앞두고 있는 점도 증시에 우호적이다. 갤럭시S8은 삼성전자가 갤럭시노트7의 사고 원인을 배터리로 밝히고, 재발 방지책을 내놓으면서 불안감이 많이 해소됐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석유화학분야도 청신호가 켜졌다. 국제유가 상승에 따른 정제마진 증가와 생산량 확대에 힘입어 지난달 수출액은 2014년 12월 이후 가장 많은 35억 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트럼프 정부의 반이슬람 정책으로 이란 등 중동 산유국들의 정유 공급이 제한될 가능성이 있어 국제유가의 강세는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달 23일 서울 중구 을지로 KEB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모습. (사진=연합뉴스)
원·달러 환율 ‘두 얼굴’
최근 원화가 강세(달러화 약세)를 보이고 있는 점도 증시에 긍정적인 신호를 주고 있다. 단, 원화 강세는 장기적으로는 수출기업들의 수익을 악화시킬 수 있는 만큼 셈법이 간단치는 않지만 일단은 증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는 올해 들어 5.2% 올랐다. 작년 말 달러당 1207.7원으로 장을 마친 원/달러 환율은 지난 3일 1147.6원으로 한 달여 만에 60원 이상 하락(원화 가치 상승)했다. 이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과 일본, 독일이 환율을 조작한다고 발언한 것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도 ‘환율조작국 지정’에서 안심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왔고 이에 따라 달러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미국 외환시장 자금이 한국증시에 유입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상대적으로 돈 가치가 올라간 한국시장이 매력적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해외 주식투자 전문 커뮤니티인 유에스스탁의 장우석 본부장은 7일 CNB에 “미국 채권시장 약세와 원화 강세로 이머징마켓(자본시장에서 급성장하는 국가의 신흥시장) 펀드 자금이 점차 한국증시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환율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영항을 준다. 수출물량이 늘어도 환율이 하락하면 환차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 현대자동차그룹의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는 원/달러 환율이 10원 하락할 경우 자동차업계 매출이 연간 4200억원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앞뒤를 종합해보면, 환율 하락이 당장 증시에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수출기업들이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적정선에서 안정되는 것이 최상이란 얘기다.
▲지난 1월 수출이 403억 달러로 전년 같은 달보다 11.2% 증가했다. 우리나라 수출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한 것은 2013년 1월 이후 4년 만이다. 지난 1월 27일 부산항 신항 부두에 접안한 컨테이너선. (사진=연합뉴스)
아직 먼 길…곳곳이 기사밭길
이처럼 한국증시에 우호적인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지만 여전히 신중론도 나온다.
꽁꽁 얼어붙은 경기 탓에 한국은행은 최근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8%에서 2.5%로 하향 조정했다. 이는 2012년 3분기 이후 가장 비관적인 관측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과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불확실성, 이자 상승에 따른 가계 빚 상환부담 증가 등이 소비의 발목을 잡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와이즈에프엔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실적을 발표한 유가증권시장 상장 79개 종목 중 실적추정치보다 10% 이상 영업이익이 낮은 종목은 42개에 달했다. 절반이 넘는 종목이 어닝쇼크 수준의 초라한 실적을 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환경은 우호적이지만 내수 경기가 워낙 악화된 만큼 대형주 위주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 개인은 상대적으로 변동성이 덜한 코스피시장의 대형주와 중형주를 각각 9조300억원어치, 1조8200억원어치 순매도한 반면 코스피시장의 소형주와 코스닥 종목을 각각 6650억원어치, 5조7400억원어치 순매수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개인투자자가 지난해 코스닥시장에서 순매수한 상위 20개 종목의 평균 수익률은 -30.51%인 반면, 기관투자가들은 같은 기간 21.39%의 수익을 올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시전문가는 “글로벌 시장흐름이 양호한 수출 대형주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국내 기반의 중소형주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장세가 펼쳐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고 조언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