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국적선사 한진해운의 앞날이 안개속이다. 시장에서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지원여부를 놓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채권단과 한진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법정관리, 파산, 현대상선과의 합병 등 시나리오도 분분하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면서 대한항공 등 한진 계열사들의 주가가 연일 요동치고 있다. 운명의 여신은 누구 편일까. (CNB=도기천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 4월 29일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지원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이날은 한진해운 회장 취임 2주년이 되는 날이자,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한 직후였다. (사진=연합뉴스)
멀어진 ‘육해공 종합물류회사’의 꿈
조양호 회장 경영권 방어 안간힘
사활 건 마지막 치킨게임 성공할까
한진해운 사태가 장기화 되고 있는 배경에는 복잡한 사정이 뒤엉켜있다.
대주주(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가 과감히 경영권을 포기하고 떠난 현대상선과 달리, 한진해운을 지배하고 있는 조양호 회장의 속내는 열길 물속이다.
한진그룹은 지난 4월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하면서 터미널 및 사옥 등을 팔아 4112억원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베트남 터미널 지분 매각 등을 통해 1700억원 규모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다른 기업들의 자구안 이행과 비교하면 결코 뒤지지 않는 속도다.
하지만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용선료 하향 조정, 선박대출 만기 연장 등을 전제로 7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상태다.
채권단이 다시 채찍 가한 데는 한진해운과 함께 해운업 양대 축을 형성해온 현대상선의 ‘학습효과’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상선을 지원하기 위해 현대그룹은 2013년 3조3000억원 규모의 자구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후 알짜 계열사인 현대로지스틱스와 현대증권 등을 매각해 현대상선에 투입했고, 용선료 조정, 사채권자 채무조정, 세계 해운동맹 가입, 현정은 회장 사재출연 등 채권단이 요구했던 자구책을 모두 완료했다.
하지만 끝내 현대상선은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 채권은행들은 출자전환(기업에게 빌려준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을 통해 현대상선을 직접 경영하길 원했고 현 회장이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은 이달 초 신주 상장을 실시했고, 30% 안팎이었던 현 회장 일가의 지분은 현재 2%대까지 내려갔다. 현대그룹 안팎에서는 “하라는 대로 다했는데도 결국 회사를 뺏겼다”는 불만이 나온다.
▲서울 여의도동 한진해운 본사 건물. 건물 옆 신호등에 지금의 한진해운 상황을 나타내듯 빨간불이 켜져 있다. (사진=연합뉴스)
‘현대상선 데자뷰’ 현실되나
현대상선의 예는 조 회장에게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반대로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기선을 잡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더구나 한진해운의 자율협약이 다음달 4일로 만료될 예정이라 ‘공’은 사실상 채권단에게 넘어온 상태다.
하지만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2014년 한진그룹 품에 안긴 한진해운은 그동안 대한항공 등을 통해 이미 1조원이 넘는 자금을 수혈 받았다. 이로 인해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이 크게 늘었고, 리스크가 실적에 반영되면서 손실액이 커지고 있다. 지난 1분기에 1749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낸 데 이어 2분기에는 2508억원으로 적자폭이 확대됐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지원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세계적인 경기불황과 컨테이너 선사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글로벌 해운시장의 앞날을 보장받기 힘든 상황이다. 한진그룹의 한진해운 지원설이 나올 때 마다 대한항공 주가가 폭락한 점은 시장의 우려를 반증하고 있다. 대한항공 안팎에서는 “한진해운을 더 지원하면 배임이 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부산신항에서 컨테이너를 싣고내리는 한진해운 선박. 2013년 이후 한진해운이 부산항의 컨테이너 물동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해마다 하락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산업은행 최후 목표는 경영권 장악?
설령 한진해운이 정상화 수순에 돌입하더라도 조 회장이 계속 경영권을 갖게 될지는 의문이다.
조 회장은 지난 4월 채권단에 자구안을 내면서 경영권 포기각서를 함께 제출한 상태다. 현대상선의 경우에서 보듯 채권단이 금융 지원을 조건으로 출자전환을 통해 지배권을 가져갈 가능성이 있다.
한진그룹이 기존 자구안에 담긴 4112억원 규모 외에는 지원여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한진그룹이 원래 계획대로 4112억원 범위 내에서 유상증자를 진행하고, 부채를 출자전환 하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다.
현재 한진해운은 대한항공이 33.23% 지분을 가진 최대주주며, 대한항공은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과 조 회장 일가가 지배하고 있다. 기존 자구안 대로 진행될 경우 출자전환, 감자 등을 시행하더라도 채권단 지분이 20%를 넘지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유동성 확대 규모가 이보다 커질 경우, 대한항공은 한진해운 지분을 더 내놔야 하고 반대로 채권단 지분은 늘어나게 된다. 현대상선의 사례가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그렇다고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포기할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이미 1조원에 이르는 자금을 쏟아 부은데다가, 그의 숙원이 ‘육·해·공 종합 물류회사’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은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최근 수년간 대대적인 사업재편과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해 왔다. 한진칼을 지주회사로 세워 ‘정석기업-한진-한진칼-정석기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는가 하면 에쓰오일 지분, 부동산 매각 등을 통해 몸집을 줄였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현 유수홀딩스 회장·사진)은 2007년부터 한진해운의 경영을 맡았지만 고전하다 2014년 경영권을 시숙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넘겼다. 한진그룹은 대한항공 등을 통해 한진해운에 1조원의 유동성을 지원했지만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지경이 됐다. (사진=연합뉴스)
파산이냐, 합병이냐 운명 초읽기
이런 점에서 조 회장의 버티기를 ‘치킨게임’ 성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자율협약 종료일까지 양측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면 채권단 지원이 자동 철회되고 한진해운은 회생이 불가능해져 법정관리 수순을 밟게 된다. 법정관리를 신청하면 해외 선주들이 채권 회수에 나서면서 한진해운 소속 선박 90여척이 전 세계 곳곳에서 압류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내년에 출범하는 해운동맹 ‘디 얼라이언스’에서도 퇴출당해 원양선사의 역할을 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채권은행들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조 회장이 채권단과 치킨게임(두 대의 자동차가 서로 정면을 향해 달리는 상황)을 벌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해운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1위 선사가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상당한 혼란이 야기되고 전후방 산업의 도미노 붕괴가 우려 된다”며 “채권단이 이런 상황을 자초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조 회장이) 전략을 짜뒀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채권단이 치킨게임을 피해 제3의 길을 택할 수도 있다. 한진해운의 파산이 아닌 현대상선과의 합병 가능성이다. 채권단이 한진의 자구안을 돌려보내고 법정관리를 택한 뒤 이미 산업은행이 관리하고 있는 현대상선과 합친다는 시나리오다. 이리되면 조 회장에게는 아무 실익이 없게 된다.
한국선주협회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한진해운이 살아남는 게 최선책이지만 그렇게 안될 경우 현대상선과의 통합을 생각해 볼 수 있다”며 “해운산업의 규모와 영업망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