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기업 금융계열사 64곳의 최대주주가 적격성 심사를 받게 됐다. 재계는 금융산업의 자율성을 위축시킨다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은 여의도 금융가 전경. (사진=CNB포토뱅크)
점포를 두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예금, 대출, 펀드 가입 등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인터넷전문은행’ 출범을 코앞에 둔 시점에 금융계열사를 둔 재계 총수들이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받게 돼 주목된다. 대기업의 금융사 소유를 제한하고 있는 ‘은산분리법’이 인터넷은행의 발목을 잡고 있는 가운데, 적격성 심사까지 진행되면 재벌들의 금융업 진출이 더 위축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CNB=도기천 기자)
64개 금융사 대주주 자격심사
재계 “금융산업 자율성 위축”
재벌의 은행업 진출 ‘산 넘어 산’
이번 달부터 시행되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 따라 대기업 금융계열사(보험·카드·증권) 64곳이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받게 됐다. 적격성 심사는 금융당국이 금융사 대주주의 위법 사실 등을 따져 주주자격 제한 여부를 판단하는 제도다.
금융사를 계열사로 둔 대다수 대기업들이 순환출자형 지배구조를 갖고 있는 점을 감안해, 이 법은 재벌 총수 일가가 직접 금융사의 대주주가 아니더라도 실제 지배형태를 보고 대주주 자격을 판단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CNB에 “공정거래법상 순환출자가 있는 경우에는 동일인(총수)이 심사 대상”이라며 “공정거래법상 자산 5조원 이상의 대기업집단은 각종 규제대상인 만큼, 이미 공정위에서 해당 기업들의 순환출자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령 현대카드의 경우 최대주주인 현대자동차의 최다 출자자가 현대모비스, 현대모비스의 최대주주는 기아자동차, 기아자동차의 최대주주는 현대자동차이기 때문에 개인인 최대주주가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총수를 대주주 적격성 심사대상으로 간주한다.
한화생명은 최대주주 법인인 한화(21.6%)의 최다 출자자인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한화 지분 22.7% 보유)이 심사대상이다.
롯데카드는 최대주주인 롯데쇼핑의 지분 14.59%를 보유하고 있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심사를 받게 된다.
지배구조가 간단명료한 기업도 있다. 삼성생명은 지분 20.76%를 보유한 최대주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대주주 적격성 심사대상이다.
▲재벌의 금융자본 소유를 제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대기업의 금융업 진출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사진은 명동 증권가의 모습. (사진=이성호 기자)
걸리면 의결권 최대 5년 제한
금융위로부터 업무를 위탁받은 금융감독원은 내년에 첫 대주주 적격성 심사에 착수한다. 심사 결과 대주주가 최근 5년 이내에 조세범 처벌법, 공정거래법 등 금융 관련 법령을 위반해 벌금형 이상을 받으면 시정명령을 받거나 10% 이상 보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이 최대 5년간 제한된다. 최초의 심사 결과는 내년 5월께 나올 것으로 알려졌다.
재벌닷컴 분석에 따르면, 심사대상 대기업집단은 모두 20곳(계열금융사 64개)이다.
삼성그룹에선 삼성화재 삼성생명 삼성선물 삼성자산운용 삼성에스알에이자산운용 삼성증권 삼성카드 삼성벤처투자를, 현대차그룹에선 현대캐피탈 현대카드 현대커머셜 현대라이프생명보험 HMC투자증권이 심사 대상이다.
SK그룹은 SK증권, 롯데그룹은 롯데카드 롯데캐피탈 롯데오토리스 롯데손해보험, 한화그룹은 한화생명보험 한화손해보험 한화자산운용 한화투자증권 한화인베스트먼트 드림플러스아시아, 현대중공업그룹은 현대기업금융 현대기술투자 현대선물 하이투자증권 하이자산운용, 동부그룹은 동부생명보험 동부자산운용 동부증권 동부캐피탈 동부화재해상보험, 태광그룹은 흥국생명보험 흥국화재해상보험 흥국증권 흥국자산운용이 대상이다.
금융그룹으로는 미래에셋과 교보생명, 한국투자금융 등이 심사를 받게 된다.
미래에셋그룹은 미래에셋대우증권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증권 미래에셋생명보험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벤처투자, 교보생명그룹은 교보생명보험 교보라이프플래닛생명 교보악사자산운용 교보증권, 한국투자금융그룹은 한국투자금융지주 한국투자금융 한국투자캐피탈 한국투자파트너스 이큐파트너스 한국투자신탁운용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이 검증을 받게 된다.
대기업 계열임에도 그동안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금융사들도 있다. 두산그룹 계열 투자사인 네오플럭스, CJ그룹 계열인 산수벤처스, 하림그룹의 에코캐피탈, KCC그룹의 케이퓨처파트너스 등이다.
이밖에도 LS그룹 계열인 LS자산운용, 효성그룹의 효성캐피탈, 코오롱그룹의 코오롱인베스트먼트, 현대산업개발의 HDC자산운용, 삼천리그룹의 삼천리자산운용이 심사대에 오르게 됐다.
그동안 심사대상은 은행·저축은행에만 국한됐으나 2013년 ‘동양 사태’를 계기로 재벌의 금융사 소유를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범위가 넓혀졌다. 동양 사태는 동양그룹이 계열사인 동양증권을 통해 수조 원대 부실 회사채(CP)를 발행해 5만여 명의 피해자를 낳은 사건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심사범위 모호
하지만 일각에서는 대주주 적격성 심사 범위가 너무 넓어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금융당국에서는 사실상 그룹 총수 모두를 심사 대상으로 보고 있지만,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총수들도 있어 모호한 측면이 있다.
가령 롯데그룹은 광윤사, 롯데홀딩스, L투자회사 등 일본 계열사를 이용해 수십 단계의 다단계 출자를 통해 국내 계열사를 지배하고 있다. 롯데그룹을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사람은 신동빈 회장이지만 공정거래법상 동일인(총수)은 경영에서 손을 뗀 신격호 총괄회장으로 공시돼 있다.
이런 가운데 신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은 호텔 롯데의 최대주주인 일본 광윤사를 통해 이번 심사 대상 기업인 롯데손해보험과 롯데캐피탈을 지배하고 있다.
롯데는 한때 호텔롯데를 상장해 지배구조를 투명하게 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최근 각종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상장이 불투명한 상태다.
이처럼 복잡한 순환출자에서 실제 대주주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CNB에 “롯데의 경우는 구체적 사례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주주 심사에 관해) 답변할 단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은산분리 규정에 막혀 인터넷전문은행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금융사 대주주 적격성 심사까지 진행되면 대기업의 은행업 진출이 더 위축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K뱅크’가 입주한 서울 광화문 더케이트윈타워 전경. (사진=KT제공)
한편으로는 대기업의 은행업 진출을 위축시킨다는 시선도 있다. 산업자본의 금융회사 지분참여를 제한하고 있는 은산분리 규정(은행법)에 막혀 인터넷전문은행이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금융사 대주주 적격성 심사까지 진행되면 더 분위기가 위축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인터넷은행은 핀테크(FinTech)를 기반으로 지점 없이 인터넷·모바일만을 이용해 시중은행처럼 예금수신·이체·대출 등 각종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정부는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난해부터 인터넷은행의 출범을 적극 추진해왔다.
KT, 우리은행, GS리테일, 한화생명보험, 다날 등이 참여하고 있는 ‘K뱅크’와 한국투자금융지주와 카카오가 주축이 된 ‘카카오뱅크’가 이미 예비인가를 받았고, 올해 안에 문을 열 계획이다.
하지만 현행 은행법은 비금융사(산업자본)의 은행지분을 4%(의결권 미행사 시 10%)로 제한하고 있어, 대기업이 인터넷은행에 참여하기 힘든 상황이다. 은산분리 완화 규정을 담은 은행법 개정안이 지난 19대 국회에 이어 20대 국회에서도 제출돼 있지만, ‘재벌의 사금고화’를 우려하는 야당·시민단체의 반발로 표류하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금융사 대주주의 자격심사, 은산분리 원칙 등이 공통적으로 ‘재벌’을 타깃으로 하고 있어 정부 눈치보기 바쁘다”며 “금융선진화 일환으로 인터넷은행이 도입됐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은행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대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