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신정아 두 사람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창작인들이었으며, ‘자유’ ‘상상’이라는 담론 속에서 서로 소통했다. 지난해 6월 경기도 부천 석왕사 천상법당에서 열린 '조영남이 만난 부처님'展에서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갖고 있는 조영남씨와 신정아(오른쪽)씨. (사진=연합뉴스)
2007년 학력 위조와 권력형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정아(44·여)씨가 사기 혐의(미술품 대작)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가수 조영남(72)씨를 여러 경로를 통해 두둔하고 나서 주목된다. 언론 노출을 꺼려온 그녀가 조씨의 대작 논란에 대해 적극 나서면서 두 사람의 ‘20년 인연사(史)’가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세상의 오해와 비난을 무릅쓰고 서로를 지키려는 진짜 이유는 뭘까. (CNB=도기천 기자)
‘자유로운 영혼’ 신정아·조영남
세상의 금기 깨며 솔직한 외침
‘반성 없는 아집’ 비판에도 꿋꿋
조영남과 신정아. 이 생뚱맞은 조합의 시작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신씨는 금호미술관 큐레이터였고 조씨는 1994년 ‘HAENAH-KENT 갤러리 초대전’을 시작으로 미술계에 작가로 입문한 상태였다.
‘한국화랑미술제 이목화랑 초대전’을 준비 중이던 조씨는 1997년 처음 신씨를 만났다. 조씨는 서양화가 곽훈 선생의 전시회에 갔다가 신씨와 조우했다. 조씨는 방송에서 당시 만남에 대해 “신정아씨가 가장 예쁠 때 만났다. 매일 그 전시회에 갔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여러 전시회를 함께 관람하고 서로의 작품세계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눴던 것으로 전해진다.
같이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돌잔치에도 함께 다녔다. 신씨가 조씨의 ‘여친’이라는 소문이 돌자, 조씨는 연예프로에 출연해 “신정아는 내 어장관리 1호”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둘이서만 만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조씨는 방송에서 “신정아와 나랑 손잡고 가는 걸 사진 찍어 올리면 내 재산을 다 주겠다”며 ‘그런 사이’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2007년 신씨의 학력 위조 사건이 터지자 조씨는 “신정아가 학위 없이도 성공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문화계에 큰 공을 세웠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었다. 각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조씨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넘쳤다. 대부분이 “과정(학력)을 무시했다”는 비난이었다.
당시 신 씨는 서울대 미대 중퇴, 미국 캔자스대 미술학사, 예일대 미술사학 박사 등 화려한 학벌을 내세워 광주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 내정자, 일간지 칼럼니스트 등으로 맹활약 했지만 모든 게 ‘가짜’로 드러난 상태였다. 현재 네이버 인물검색에는 그녀의 학력란이 비워져 있다.
또 조씨는 신씨의 청와대 정책실장과의 불륜 스캔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누구나 제2의 신정아·변○○이 될 잠재 인자가 있다. 신씨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나”며 신씨를 옹호했다.
신씨가 구속되자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신씨는 최근 한 언론에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분들이 전부 ‘신정아 모른다’고 했는데, 선생님(조영남)은 흔쾌히 탄원서를 써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신씨가 1년 6개월의 수감생활을 끝내고 출소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다시 큐레이터로 복귀시킨 인물도 조씨다. 조씨는 지난해 5월 부천 석왕사에서 열린 ‘조영남이 만난 부처님’전(展)을 신씨에게 맡겼다.
신씨는 조씨에 대한 고마움을 도록에 담았다.
‘2007년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지면이 주어질 때마다 “신정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모두가 한곳을 향해 가고 있는데, 혼자만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 고마운 마음이 8년 만에 나를 다시 큐레이터로 이끌었다. 배려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것이 선생님의 소통법이다.’
▲지난해 6월 '조영남이 만난 부처님'전의 작가와의 대화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는 신정아씨(왼쪽), 지난해 7월 청담동 자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조영남씨. (사진=연합뉴스)
‘기막히게 닮은’ 두 사람 인생역정
신씨는 최근 조씨가 대작(代作) 논란에 휩싸이자 구원투수를 자처했다.
현재 조씨는 무명화가 송모씨가 대작 의혹을 제기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남이 대신 그린 그림을 자신의 것이라고 속여 팔았다면 사기죄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게 검찰 논리다.
평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녀였지만, 지난 17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작품을 하다 맘에 안들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등 상당히 꼼꼼하고 섬세한 분이다. 집에서 직접 작품 그리는 모습을 많이 봐 왔다. 본인(조영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하는 과정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 분 작품이 맞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언론 인터뷰에서는 “큐레이터로서 작품을 볼 때 생명력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잣대인데, 선생님의 작품은 아이디어가 매우 자유롭고 창의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송씨는 조수로 참여했을 뿐이며 내 창의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조씨 본인의 해명보다도 더 나간 발언이다. 그만큼 신씨의 조씨에 대한 믿음은 굳건해 보인다.
두 사람이 세상의 갖은 오해와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서로를 지키려는 진짜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기막히게 비슷한 두 사람의 인생역정(人生歷程)이 배경이 되고 있다.
두 사람에게는 늘 ‘자유인’이라는 닉네임이 따라 다녔다. 조씨는 1970년대 포크송 열풍을 주도했던 음악감상실 ‘쎄시봉’을 통해 등극했다. 젊음의 거리 무교동 최고의 핫플레이스였던 그곳에서 ‘마성의 미성’ 윤형주와 ‘타고난 음악천재’ 송창식 등을 만나 자유를 꿈꿨다.
신씨 또한 독특한 예술세계를 가졌다. 젊은 나이에 광주비엔날레 공동예술감독으로 전격 발탁될 정도로 기획력이 뛰어났다.
신씨·조씨 모두와 지인이라는 한 미술계 인사는 “20대 시절을 가장 화려한 자유정신으로 보낸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씨가 창작활동을 힘들어 할 때마다 신씨는 “선생님 작품에는 클림트나 피카소에게 없는 재미와 위트가 있다”며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변○○ 전 청와대 정책실장, 정○○ 전 총리 등의 실명이 등장하는 신정아씨의 에세이집 <4001>. “아니면 나를 때려라” 식의 솔직한 언행은 조영남 씨를 빼닮았다.
두 자유인이 꿈꾼 세상은…
두 사람의 정신세계가 합치된 대표적인 예가 ‘조영남이 만난 부처님’전(展)이다.
조씨는 도록의 ‘작가의 글’에서 “팔자 드세기로 유명한 신정아 큐레이터가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 절에서 미술전시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김정신 권사의 아들 조영남이 법당 그림 전시를 하다니, 이건 뭐 재미를 떠나 국내 최초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의 미술 이벤트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음대를 졸업해 놓고도 신학에 탐닉하는 등 기독교신앙에 빠졌던 그가 절에서 작품전시회를 연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이를 현실로 만든 게 신씨다. 신정아는 ‘자유인’ 조영남을 제대로 이해하는 유일한 ‘큐레이터’였다. 두 사람은 염주 대신 십자가를 두 손에 들고 합장하는 작품 ‘조영남이 만난 부처님’을 탄생시켰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내지르는 자유분방한 스타일도 두 사람이 꼭 닮았다. 조씨는 2005년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펴냈는데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00년 간 단절된 일본과의 관계를 복원하자는 주장을 펴다 친일 논란에 휩싸여 뭇매를 맞았다.
신씨 또한 2011년, 변○○ 전 청와대 정책실장, 정○○ 전 총리 등의 실명이 등장하는 에세이집 <4001>을 출간해 논란을 일으켰다. 세간에 떠돌던 ‘스캔들 이야기’를 대놓고 공개한 것.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두 사람의 솔직한 언행에 ‘질서에 갇힌 세상’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이들에게 ‘이성적인 반성’은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대작 혐의와 관련해 조씨는 ‘누가 뭐래도 내 작품’이라고 우기고 있고, 신씨는 과거 감옥을 다녀온 뒤 자서전을 펴내는 등 ‘희생양’이 된 듯 행동했다.
대중평론가 구병두 박사(교육학)는 CNB에 “조씨와 신씨 사건은 ‘실적주의에 매몰된 이상적 창작가들이 초래한 결과’라는 공통점이 있다. 오직 자신의 창의성만 알아달라는 조씨와 큐레이터로서의 실력만 우수하면 됐지 학력이 무슨 소용이냐는 신씨의 정신세계는 닮아 있다. 이들에게 제3자의 헌신, 노동(대작 알바)의 가치, 사회적 파장 등은 별로 중요한 항목이 아닌 듯싶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