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축산연합회 등 농축산 단체 회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김영란법으로 농축산물 선물 세트의 판매가 감소할 수 있다”며 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김영란법이 선물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어 제한선인 5만원을 넘기지 않는 범위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선물을 보낼 경우 제재할 방법이 없다. (사진=연합뉴스)
말많았던 김영란법이 13일 입법예고 된 가운데 시행령 여러 곳에 허점이 발견되고 있다. 이해당사자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는 선물, 식사비의 상한액을 명시했지만 횟수를 제한하지 않아 ‘쪼개기 접대’가 횡행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3월 법안이 제정된 이후 1년 넘게 준비해온 시행령으로 보기에는 미비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CNB가 여러 경우의 수를 따져 어떤 ‘구멍’이 있는지를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접대비 횟수 제한 행없어
쪼개기 접대 횡행할 듯
시행령 더 구체화 해야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는 13일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내달 22일까지 의견을 듣고 오는 9월 28일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시행령에는 식사비 3만원, 선물비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 등 접대비용의 상한선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적용대상은 공무원, 언론인, 교직원과 이들의 배우자다.
법안의 가장 큰 허점은 접대비의 횟수를 제한하지 않았다는 점. 시행령 6조는 사교·의례 등 목적으로 제공되는 금품 등의 액수를 음식물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 이하로 규정했다.
하지만 ‘몇 번까지만 가능하다’는 범위를 정하지 않았다. 하루에 법인카드를 수십 번 긁더라도 각각의 전표가 3만원을 넘지 않으면 사실상 처벌이 어렵단 얘기다.
CNB가 국회 주변 식당들을 둘러본 결과, 조용히 담소를 나눌 공간이 있는 음식점의 점심 세트메뉴가 대부분 1인당 3만원을 넘었다.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게 되면 1인당 4~5만원은 훌쩍 넘게 된다. 저녁메뉴는 최소 1인당 4~5만원 대였으며 회나 고기를 곁들이게 되면 6~7만은 기본이 된다.
이를 쪼개서 결제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가령 현역의원이 국정감사를 앞두고 피감기관 소속 공무원(대관팀)으로부터 식사 대접을 받을 경우, 해당공무원이 김영란법 범위(1인당 3만원) 내에서 식당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각각 한 번씩 카드를 긁게 되면 1인당 6만원까지 접대가 가능해진다. 또 식사 후 자리를 옮겨 호프집에서 가볍게 한잔 할 경우도 앞의 식사비와 합산되지 않으므로 법에서 규제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
권익위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시행령에서 (식사접대)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있으므로 고의적으로 분할해서 밥을 사는 행위 등에 대해 제재할 근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라며 “다만 법에서 정한 사교·의례 목적에 부합되느냐와 장소·시간·인물의 동일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법 저촉 여부를) 판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시간대에 여러 차례 법인카드가 사용됐다면 의심해 볼 수 있단 얘기다. 이리되려면 적극적인 내부고발자나 결정적인 증인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
▲서울시내 음식점 두 곳의 한정식 세트 메뉴판. 김영란법의 음식비 제한선인 3만원 이하를 찾아보기 힘들다. 나눠서 결제하는 쪼개기 접대가 횡행할 가능성이 높다. (사진=CNB포토뱅크)
5만원씩 여러번 선물 ‘가능’
선물 횟수를 정하지 않은 점도 편법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 ‘쪼개기 결제’처럼 5만원을 넘기지 않는 범위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선물 공세를 펼칠 경우 제재할 방법이 없다.
이미 백화점과 대형마트에서는 김영란법 제한 금액에 맞춰 기존 선물세트에 들어가는 항목이나 용량을 줄여서 ‘맞춤형 상품’을 만드는 데 착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백화점 업계는 선물 가격대를 5만원에 맞추기 위해 사과, 배 같은 청과는 물론 굴비세트까지 기존 수량보다 줄여서 소규모 포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렇게 변신한 ‘아담한(?) 선물’을 이해당사자로부터 매월 받더라도 과태료를 물릴 근거가 없다.
골프접대가 김영란법에 저촉되는지도 애매하다. 시행령 6조는 금품 등의 종류를 음식물, 선물, 경조사비로 규정했다. 구체적으로 음식물은 식사 다과 주류 음료를, 경조사비는 축의금 조의금 등 각종 부조금과 화환·조화 등 부조금을 대신하는 물품으로 구체화 했다.
하지만 선물은 ‘금전 및 음식물을 제외한 일체의 물품’이라고 규정해 골프접대가 이에 해당되는지 논란 소지가 있다. 시행령 전문에는 ‘골프’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
설령 골프접대를 김영란법에서 금지하더라도 무기명 회원권과 가명을 이용해 얼마든지 접대골프를 받을 수 있다는 게 정·관계 안팎의 전언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법령에 식사, 선물 등의 종류와 상한선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반면 골프접대는 모호한 측면이 있는데다 여러 편법을 동원할 수 있다. 오히려 풍선효과로 골프장이 더 붐빌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역의원 사실상 ‘면죄부’
국회의원에게 지나치게 ‘면죄부’를 준 점도 문제로 꼽힌다. 현역 의원은 정치자금 조달이 법 적용대상에서 애초부터 빠졌다. 후원금 모금과 출판기념회를 통해 정치자금을 모으는 행위가 예전처럼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상임위 소속 기관·기업 등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을 수 있으며, 이해관계인이 의원의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구매해도 무방하다.
국회의원이 ‘공익을 목적으로 고충 민원을 전달하는 경우’는 김영란법에서 예외로 했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는 3만원 이상의 식사도 허용된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직무 연관성을 따지자는 게 김영란법의 취지인데 후원금을 내거나 출판기념회에서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 청탁 목적이 없다고 할 수 있겠나. 사실상 의원들에게 특혜를 준 법안”이라고 지적했다.
▲‘김영란법’을 발의한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영란 석좌교수가 지난 11일 학교 교수실을 나서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내부자 신고’만 기댈 판
법을 어긴 사람을 적발할 수 있는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다.
김영란법은 동일인에게 1회 100만원(연 300만원)을 초과해 금품 등을 수수하는 경우 직무연관성에 상관없이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직무와 관련해 100만원 이하의 금품 등을 수수하거나 접대비(음식물·선물·경조사비) 상한선을 어겨도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쪼개기 결제 등 편법으로 접대를 벌인 경우, 신고자가 없으면 이를 따지기가 힘들다. 공기업은 감사원 등에서 감사를 실시하므로 영수증 쪼개기 등 각종 편법 접대가 적발될 가능성도 있지만, 사기업 감사는 관행상 이같은 행위를 문제 삼기 힘든 실정이다.
한 대기업의 회계담당자는 CNB에 “대부분 기업들이 1회당 접대비를 50만원으로 제한하는 내부규정이 있지만 증빙서류만 잘 맞추면 문제 삼지 않는다”며 “가령, 밤 11시59분에 49만원을 결제하고, 2분 뒤인 12시 1분에 49만원을 결제해도 두 건의 날짜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감사에 걸리지 않는다”고 귀뜸했다. 김영란법도 이런 수법으로 얼마든지 편법결제가 가능하단 얘기다.
이밖에도 더치페이로 계산하고 나중에 현금이나 상품권으로 식사비를 돌려주는 ‘페이백’, 식당 주인과 말을 맞춰 일단 외상으로 거래하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일괄 정산하는 방식 등 갖은 편법이 동원될 것이라는 게 여의도 안팎의 전언이다.
하지만 사회분위기가 달라진 만큼 예전보다는 청탁 자리가 줄어들 것이라는 낙관론도 여전하다.
정세현 경영컨설턴트는 CNB에 “당연히 편법이 난무하겠지만 공직사회 전반적으로 술자리가 줄어들고 리베이트가 위축되는 효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한번 법안이 시행되면 다시 바꾸기 힘든 만큼 입법예고 기간(40일) 안에 최대한 시행령을 보완하는 게 그나마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각계각층의 여러 의견을 수렴해 시행령에서 보완할 점이 있다면 보완 하겠다”고 밝혔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