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증권 매각이 성공하면서 현대상선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가운데, 현대상선 2대주주인 현대중공업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사진은 울산항에 정박 중인 현대상선 5천500TEU급 컨테이너선(왼쪽)과 현대중공업 본사 사옥. (사진=CNB포토뱅크, 연합뉴스)
현대그룹 생존전략의 핵심인 현대증권 매각이 예상 외의 흥행을 거두면서 범(汎)현대가가 모처럼 활짝 웃었다. 현대증권의 매각은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등 현대그룹 핵심계열사들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인데다, 현대상선 주식을 보유한 현대중공업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증권이 위기의 현대가를 살리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까. (CNB=도기천 기자)
현대중공업→현대상선→현대증권 연결고리
1조원대 매각 대박…현대그룹 재도약 발판
KB금융이 지난달 31일 현대증권 인수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현대그룹의 유동성에 숨통이 트이게 됐다. KB금융의 현대증권 인수 가격은 당초 예상 가격인 7000억원을 휠씬 웃도는 1조원~1조1000억원선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처음 현대증권이 매물로 나왔을 때는 시장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오릭스 프라이빗에쿼티가 인수의향을 비췄으나 일본계 자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 부담 등이 영향을 끼치면서 무산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미래에셋 컨소시엄(미래에셋증권·미래에셋자산운용)이 업계 2위인 KDB대우증권을 인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래에셋의 일방적인 독주가 예상되자 증권가는 업계 6위인 현대증권에 눈독을 들였고, KB금융과 한국금융지주는 둘 다 1조원이 넘는 입찰금액을 베팅했다.
특히 KB로서는 이번 입찰이 절실했다. KB투자증권은 KB금융 소속이라는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 후순위(18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인수·합병을 통해 돌파구를 모색했지만 KDB대우증권 인수전 등에서 잇따라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KB가 현대증권을 품게 된 터라 최종 인수까지 무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한국금융지주가 KB보다 수백억원을 더 썼음에도 현대그룹이 KB금융의 손을 들어준 점도 이런 전망에 무게를 싣고 있다. 양측은 5~6월 내에 인수협상을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현대증권 매각 성사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현대그룹이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됐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달 10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전국상의 회장단 정책간담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숨 돌린 현대그룹
현대그룹이 주력 계열사인 현대증권을 시장에 내놓은 것은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서다. 현대상선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가로 시집오기 전 아버지가 창업한 기업으로, 현 회장의 애착이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상선의 지난해 말 기준 자본총계 대비 자본금 비율은 36.8%(자본잠식 63.2%)에 불과하다. 2014년 65.2%에서 반 토막 난 수치다. 부채 규모가 6조원 대에 달하고 있으며 당장 이번 달과 7월에 약 5000억원 규모의 채권 만기가 돌아온다.
이에 현정은 회장이 300억원 규모의 사재를 출연했으며, 현대상선 팀장 이상 간부들은 백의종군을 선언한 상태다.
현대그룹은 2013년 3조3000억원 규모의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자구안을 발표한 후 2년여 만에 목표치 대부분을 이행했지만, 글로벌 해운업황의 악화로 좀체 회복국면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KB가 사들일 현대증권 지분 22.43%는 현대상선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다. 현대상선은 매매자금이 들어오는 대로 지난해 현대증권 주식을 담보로 현대엘리베이터 등에서 대여한 4000억원을 우선 변제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현대엘리베이터의 재무구조는 한층 탄탄해질 전망이다. 나머지 자금은 만기가 돌아오는 금융채권을 상환하며 최대한 시간을 벌 생각이다.
현대상선 측은 “현대증권 매각 대금은 채권단과 협의해 현대상선 운영자금으로 우선 활용하는 등 사업 정상화와 재무구조 안정화에 주력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현대증권 주식 매각으로 현대상선이 제자리를 찾게 되면, 범현대가 기업들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현대차 완성품들이 울산항에 정박 중인 현대글로비스 선박 앞에서 해외시장 진출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현대상선-현대重 시너지 낼까
이번 매각은 범현대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증권 지분을 팔아 현대상선이 재도약하게 되면, 실적악화 위기에 처한 현대중공업도 한숨 돌리게 된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상선 지분 9.9%를 가진 2대주주다. 현대엘리베이터(17.96%) 다음으로 많은 주식을 갖고 있다. 현대상선 주가가 1년 새 3분의 1 수준으로 추락하면서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가치는 애초 2천억원대에서 작년 말 900억원대로 쪼그라들었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상선 주식을 내다 팔 수도 없는 처지다. 유동성 확보를 위해 현대상선 주식을 담보로 교환사채(EB)를 발행해 지분 처분권이 묶였기 때문.
현대중공업은 작년 6월 현대상선 주식을 담보로 2억2천만 달러(2400억원)어치의 EB를 발행했다. 현대중공업이 EB를 발행할 당시만 해도 현대상선 주가는 7천∼8천원선을 오갔지만 지금은 2천원대로 추락한 상황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선·철강 경기마저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자 현대중공업은 작년부터 자금 수혈에 나선 상태다. 2010년 인수한 현대오일뱅크를 통해 5년 만에 실적배당을 실시, 배당금 형태로 2079억원을 수혈 받을 예정이다. 또 부동산 등 보유 자산 매각으로 현금을 마련하고 있다.
한 푼이 아쉬운 상황에서 현대상선 주가가 제자리를 찾아 간다면 현대중공업으로서는 상당한 동력이 될 수 있다. 조선과 해운의 시너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증권업계에서는 국제유가와 신흥국들의 수출·수입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 조선·해운업의 수익성도 점차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경기의 불확실성이 여전해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지만, 현대상선이 글로벌 선사들과의 용선료(선박 대여료) 인하 협상에 성공하면 상당부분 수익이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다”며 “현대가 기업들이 대부분 수출 주력이라는 점에서 현대상선의 회생은 현대가 전체에 긍정적인 시너지를 가져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백훈 현대상선 대표는 최근 조찬 간담회에서 “‘사즉생’의 죽을 각오로 반드시 성과(용선료 인하)를 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