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투표제 의무화’가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정부가 이번에 규제 불가 입장을 밝힌 터라 전자투표제 또한 힘을 받지 못하는 형국이다. (CNB=이성호 기자)
상장사 중 70%가 ‘3월의 금요일’ 주총
법무부, 주총일 법적규제 ‘부적절’ 입장
‘전자투표제 의무화’ 국회 통과 난항
한국예탁결제원과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올해 상장회사의 주주총회 개최일은 3월 셋째 주와 넷째 주 금요일에 몰렸다.
12월 결산 상장회사 1840개사 중 무려 44%인 810개사가 3월 27일, 22%인 409개사가 3월 20일에 주총을 열었다. 지난해의 경우 1761개사 중 38%인 662개사가 3월 21일, 28%인 497개사가 28일에 개최해 올해는 슈퍼주총데이가 더욱 심화된 것으로 드러났다.
삼성, 현대, LG, 포스코, 롯데, 한화, 두산, 효성, SK, CJ, 신세계, 한진칼 등 재계순위 50위권 내 대기업 대부분이 3월에 주총을 갖고 있다.
3월에 주총이 집중되는 이유는 뭘까. 회사는 ‘상법’,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의한 법률’ 등에서 정하는 절차에 따라 (연결)재무제표를 작성한 후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 3월 말까지 금융위원회 등에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12월 말 사업연도 종료 후, 재무제표 작성 및 이사회 승인과 감사보고서 작성 및 회계법인의 외부감사 절차 등을 거치는 시간이 최소 2개월 이상 소요된다.
문제는 각 기업들의 주총이 한날에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일반 주주들이 참석하기 어렵고 의결권이 제한받는 폐해가 발생되고 있다는 것.
소액주주들의 주주권은 무력해지고 금융당국이나 시민단체, 언론의 감시 기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주총은 오너일가 및 친기업 주주들만의 잔치로 사측의 안건이 일사천리로 통과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우윤근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국감 시즌을 맞아 법무부에 주주총회 개최일 분산 방안에 대한 자료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CNB가 우 의원실로부터 단독 입수한 법무부 답변서에 따르면, 법무부는 “주총 개최일은 각 기업의 사정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항이고, 각국의 입법례 등을 살펴봐도 입법을 통해 강제하는 사례는 없는 점 등에 비춰 주총일을 법률상 규제 또는 강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회신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유가증권 상장규정 시행규칙을 통해 ‘주권 발행자는 정기 주주총회를 개최하는 다른 상장회사가 현저하게 많은 날과 동일한 날을 주주총회의 날로 정하기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로 규정해 주총 분산을 유도하고 있다.
전자투표 해본 주주 0.24% 불과
주총일 분산이 어렵다면 ‘그들만의 리그’를 막고 소액주주들의 참여를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전자투표제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자투표는 주주가 주총에 출석하지 않고 전자적 방법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며 주주들의 참여를 제고키 위해 지난 2009년 상법 개정 시 도입됐다.
예탁결제원·국회 등에 따르면 올해 전자투표를 채택한 곳은 425개사로 2014년에 79개사 대비 5배 이상 증가했는데 이는 주주의 의결권 행사를 고려했다기보다는 회사측에 유리한 섀도우보팅을 활용키 위함으로 해석되고 있다.
섀도우보팅(의결권 대리행사제도)이란 주총의 정족수를 확보키 위해 형식상 주주인 예탁원에 의해 주총의 의사정족수를 충족시켜주는 제도다.
상장사가 섀도우보팅을 신청하면 예탁원은 주총 표결결과에서 나온 찬반 비율대로 의결권을 대신 행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주총에 참석한 주주들이 안건에 대해 8대2로 찬성과 반대가 나왔다면 출석하지 않는 주주들에 대해서도 같은 비율로 표결에 참여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섀도우보팅제도는 대주주가 주총을 위한 정족수를 채우고 유리한 안건을 통과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이 있어왔고 2015년부터 폐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3년간 유예된 상태로 전자투표를 도입하고 모든 주주를 대상으로 의결권 대리행사를 권유한 회사 등에 한해 2017년 12월 31일까지는 섀도우보팅 이용이 가능하다.
기업들이 섀도우보팅을 활용코자 전자투표제를 도입하고 있지만 올해 주주의 전자투표 행사율은 주식수 기준 1.62%, 주주수 기준 0.24%에 불과하다.
이에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전자투표를 택하기 보다는 의무적으로 실시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 ‘전자투표제 의무화’ 신중론
현재 국회에는 노철래(새누리당)·우윤근(새정치민주연합)·민병두(새정치민주연합)·정호준(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전자투표제의 의무화를 담은 상법 개정 4개안이 제출돼 있지만 법안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정부가 반대하고 있기 때문.
지난 7월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법무부는 “전자투표제 의무화는 주총을 실질적으로 활성화해서 주주의 권리 행사가 용이하게 되는 면이 있지만 사적자치의 원칙에 위배되고 또 주총이 형해화된다는 우려가 있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대법원도 “전자투표제는 현행처럼 회사의 선택에 의하도록 하고 전자투표제를 정비하면서 그 활용도를 높일 만한 다른 제도적 장치나 유인책을 강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우윤근 의원실 관계자는 CNB에 “법적으로 주총 개최일을 강제화하기 힘들다면 전자투표만이라도 활성화가 필요하다”며 “이번 정기국회 기간에 법안심사가 이뤄지겠지만 정부에서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자투표제는 법무부에서 직접 지난 2013년 상법 개정안에 담아 입법예고까지 했었다.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에는 전자투표제 이외에도 집중투표제 단계적 실시, 다중대표소송 도입, 소액주주들의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 시스템 도입 등이 담겼다.
이후 시행이 미뤄지자 참여연대에서는 지난 8월 법무부에 질의서를 발송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민주화와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관한 대선공약을 구체화한 상법 개정안의 입법예고 이후의 진행 경과를 물은 것이다.
법무부는 지난달 답변서에서 “입법예고 이후 단체 또는 기업으로부터 4건의 의견이 제출됐고 제출된 의견의 반영 여부가 결정되면 그 결과를 통지할 예정”이라며 “입법예고와 2회에 걸친 공청회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이 제출돼 개정안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즉, 법안의 실제 시행이 요원해진 것이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CNB에 “상법 개정안이 구체화 돼 국회에 제출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정부에 요구할 계획으로 현재 활동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신중론을 펼치고 있어 슈퍼주총데이 문제가 당분간 해소될 여력이 없어 보이는 가운데 향후 의원발의 상법 개정안의 국회 법안심사 과정에서 진전된 논의가 이뤄질지 여부는 지켜볼 일이다.
(CNB=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