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대환대출(낮은 금리로 갈아타는 대출) 신청하셨죠? 현재 신용등급으로는 대환이 불가능하니, 일단 신용도를 높이기 위해 예금잔액을 늘릴께요. 안내에 따라 비밀번호, 보안카드번호 입력해주세요”
최근 급속히 번지고 있는 대환대출을 이용한 보이스피싱이다. 강서원(53·가명)씨는 비싼 대출금리를 낮춰준다는 말에 속아 앉은 자리에서 수천만원의 빚더미에 올랐다.
사상초유의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고 있지만 은행 문턱은 되레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 문을 두드리기 힘든 서민들이 ‘금융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7월 기준 주요 은행의 1~3등급 일반신용대출금리 평균치는 연3.43%였다. 신한은행 3.56%, 하나은행 3.51%, 국민은행 3.14%, 우리은행 3.34% 등이다.
하지만 저축은행·대부업체로 넘어갈 경우 20~30%로 금리가 치솟는다. 국회 정무위원회 김기식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이달 초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가계신용대출 잔액 상위 10개 저축은행의 신용등급별 가중평균금리의 전체 평균은 무려 28.6%(7월말 잔액기준)에 이른다.
10개 저축은행 가운데 10%대의 금리를 유지하는 곳은 페퍼저축은행(18.8%)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20%가 넘는 고금리였다. OK저축은행과 웰컴저축은행 등 대부업 계열 저축은행의 평균 금리는 30%에 육박했다.
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못하고 금리가 높은 제2금융권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최재성 의원(새정치민주연합)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고신용등급(1∼3등급)에 대한 대출 잔액은 작년 말 259조5천억원에서 올 6월 말 265조7천억원으로 6조2천억원 증가한 반면 저신용등급(7∼10등급)은 58조7천억원에서 57조1천억원으로 1조6천억원 감소했다.
이는 그동안 늘어난 가계대출이 신용도와 소득이 높은 고소득층에 집중된 반면 저소득층은 은행 대출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부가 고금리 대출자들이 저렴한 금리상품으로 갈아탈 수 있도록 내놓은 안심전환대출도 신용등급이 높은 사람들에게 쏠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대부업체들은 갈수록 몸집이 커지고 있다. 대부업체 신용대출자는 지난 4년간 220만명 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대부잔액은 급속히 늘고 있다. 한 사람당 대부업체에서 빌리는 액수가 크게 늘었다는 의미다.
금융감독원이 김현 의원(새정치민주연합)에게 제출한 ‘2012년 이후 대부업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2년 말 8조 6천억원이었던 대부업체들의 대부잔액은 2014년 12월 말 11조 1천5백억원으로 3년 만에 2조 4천억원 증가했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아프로파이낸셜대부는 대부잔액 2조 5천억원에 이르렀다.
자산 100억원 이상 대형 대부업체 110여곳의 1인당 신용대출 잔액은 350만원을 웃돌았다. 불과 2년 전만해도 270만원 수준이었으나 그새 평균 70만원 이상 급증한 것.
대부잔액이 늘면서 대부업체들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5천4백억원으로 전년 대비 2천억원이나 증가했다.
특히 일본계 자본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일본계 중 산와대부(산와머니)의 지난해 당기순이익 1678억원은 국내대부업체 60개사가 올린 당기순이익 1210억원보다 높았으며, 아프로파이낸셜대부(989억원), 미즈사랑대부, 조이크레디트대부금융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사상초유의 저금리 탓에 2~3%대로 자금을 조달해 10배 이상 예대마진(예금-대출간 이윤)을 남기고 있다. 최근 4년 새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단계적으로 내려가 현재 사상최저인 1.5%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금융당국은 인터넷전문은행, 크라우드펀딩(crowd funding) 등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인터넷은행은 지점 없이 인터넷·모바일만을 이용해 시중은행처럼 예금수신·이체·대출 등 각종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영업비용, 인건비, 점포유지비가 절감되기 때문에 중·저신용자에게 제2금융권보다 낮은 대출금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영업점 방문 없이 인터넷상으로 대출심사와 실제 대출이 이뤄진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금융당국은 중견 재벌의 인터넷전문은행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관련법 완화를 추진 중이다. 현행 은행법의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이 서로의 업종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금하는 원칙) 규정에 따르면 산업자본이 인터넷은행의 지분을 10%(의결권 행사는 4%) 이상 가질 수 없다.
당국은 인터넷은행에 한해 산업자본 지분한도를 50%로 늘리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다음카카오, KT, 인터파크 등 ICT 업체들의 인터넷은행 진출이 한결 수월해질 전망이다.
현재 출사표를 던진 곳은 ▲다음카카오, 한국투자금융지주, KB국민은행이 손을 잡은 카카오뱅크컨소시엄 ▲인터파크와 SK텔레콤, NH투자증권과 기업은행, NHN엔터테인먼트, 웰컴저축은행, 옐로금융그룹, GS홈쇼핑의 연합군인 인터파크뱅크컨소시엄 ▲벤처기업인 500V와 중소기업중앙회 등이 연합한 중소벤처 컨소시엄 등이다. 여기에 KT-우리은행-교보생명도 컨소시엄 구성을 타진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달 30일부터 내달 1일까지 예비인가신청서를 접수한 뒤, 금감원 심사(10월) 및 평가위원회 심사(11∼12월), 금융위 예비인가 의결(12월) 등 순으로 절차를 밟아 내년 상반기 중에 사업자를 최종 선정할 계획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전체 대출 시장을 보면 중금리대출 시장이 뻥 뚫려 있는 형국인데, 인터넷은행이 과도하게 벌어진 금리 간격을 중금리대출로 좁힐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중소·벤처 기업이 은행권 도움 없이 투자자를 상대로 직접 프로젝트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크라우드펀딩(crowd funding)도 양극화된 금리시장에 중간지대를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관련 법안이 통과돼 올 연말 시행을 앞두고 있다.
당장은 은행 문턱을 넘기 힘든 중소 사업자가 개인들에게 10% 안팎의 중금리로 자금을 구하는 형태지만 점차 개인 간 자금대여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KBS ‘황금의 펜타곤’에 크라우드펀딩 전문가로 출연 중인 강명재 경영학 박사(씨케이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는 CNB에 “은행과 대부업의 중간지대에 크라우드펀딩이 있다고 보면 된다. 금융사가 아닌 개인투자자들이 담보나 보증 없이 스스로 금리를 결정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이며, 이미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된 금융기법”이라고 설명했다.
한편에선 시중은행들도 중금리 시장을 기웃대고 있다. 그동안 은행들은 부실률이 높아 건전성 관리가 힘들다는 점과 2금융권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시선이 따가워 손을 놓고 있었지만, 최근 금융환경이 변하면서 조금씩 중금리 신용대출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신한·우리·기업·하나은행 등 주요 은행들은 올해 6~10%대 중금리 상품을 출시했다. 지난 5월 우리은행이 출시한 우리은행의 위비모바일대출(연 5.95%~9.75%)은 매월 100억원 가량의 대출실적을 올리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 6월 5.3~8.1% 금리의 ‘스피드업 직장인 모바일대출’을 출시해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기업은행은 모바일 앱을 통해 대출이 가능한 ‘아이원 직장인 스마트론’을 지난달 출시했다. 하나은행은 3개월 이상 급여 또는 사업소득이 있는 고객을 대상으로 연 6~10% 대출상품을 판매 중이다.
자체 중금리 상품이 없는 KB국민은행, 농협은행 등은 계열 저축은행·캐피탈로 저신용 고객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시중은행들의 중금리상품은 4~6등급의 중간신용자들을 노리고 있어 7~10등급 저신용자에게는 여전히 그림의 떡이다.
금융권에 몰아치고 있는 핀테크(FinTech·파이낸셜과 기술의 합성어. 정보화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금융시스템) 광풍이 중금리 시장을 확대하고 있지만, 저소득층에게 제대로 혜택이 돌아갈지는 안개 속이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 관계자는 CNB에 “핀테크의 발달로 신용조회기법과 상환가능성 등이 빅데이터로 집약되고 있으며, 이 정보를 전 금융권이 공유하게 되는 건 시간문제로 보인다. 결국 금리를 사람이 아닌 컴퓨터가 결정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저소득·저신용자들이 어떤 선택을 강요받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고 분석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