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십삼도의군 의암 류인석 도총재 순국 100주년 기념 순국추념향음례가 19일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 유적지에서 열렸다. 춘천문화원과 의암기념사업회·의암학회 등은 이날 향음례를 시작으로 오는 8월까지 도·시비 4억원을 들여 의병대장으로서 이미지를 구현하는 전신영정을 제작하고 화보집 제작과 기념우표 발행, 의암 어록비 설립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
류인석 선생은 1842년 1월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나 거유(巨儒) 이항로의 학통을 이어받은 대유학자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 7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망명, 1910년 십삼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됐다. 하지만 항일 투쟁을 지도하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못한 채 1915년 3월 14일 중국 요녕성 방취구에서 향년 74세로 순국했다.
의암 류인석 선생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화서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은 대유학자이고, 다른 하나는 육군의 효시인 의병을 지휘한 의병대장이다.
춘천시와 춘천문화원 등은 그간 류인석 선생의 이미지를 대유학자에 비중을 뒀으나 올해 들어 의병대장으로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갔다.
구한말 당시 대유학자로서 의미도 크지만 붓을 던진 대신 국권 회복을 위해 창을 잡고 의병을 조직하고 지휘한 의병대장으로서 역사적 의미가 더 크다고 본 까닭이다. 특히 오늘날 육군참모총장 격인 대한십삼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된 것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 적극 알려야 한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 대유학자 의암 류인석
류인석 선생은 1842년 1월 27일 춘천 남면 가정리에서 아버지 유중곤과 어머니 고령신씨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한문을 쓴 신동으로 14세에 당대에 명성 높은 유학자 화서 이항로의 문하생이 됐다.
14세 때 먼 친척인 류중선에게 양자로 입양돼 가평군 설악면 자잠 마을에 거주했다. 양증조부인 류영오는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 거주하는 당대 최고의 대학자인 화서 이항로 선생과 교류했고, 류인석은 1855년 3월부터 화서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의 학문의 연원은 율곡 이이의 학문을 계승한 기호학파에 두고 있으며, 특히 주자학문의 전통을 계승한 이는 우암 송시열이라 확신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류인석은 조선중기 대학자로 태평성대를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다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은 조광조를 흠모해 1860년 19세 때 조광조의 위패를 모신 미원서원을 찾기도 했다.
이후 류인석은 학문에만 전념했으며 중화문화를 존중하고 서양문화를 배척하는 존화양이사상과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공고히 하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
◆ 의병대장 류인석
1895년 5월 스승 류중교의 유업을 잇기 위해 제천 장담리 구탄으로 이사한 류인석은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그해 편성된 제천 의병진의 대장이 된다.
류인석은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 등으로 의병진을 편성하고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그 후 패배가 계속되었고 1896년 8월 파저강변에서 의병부대를 해산당하게 된다. 류인석은 이에 9월 중국 심양으로 들어가 통화현 오도구와 회인현 호로두 등을 전전하게 된다.
이듬해인 1897년 8월 서상무·김연식 등 고종의 사신이 초유문을 갖고 찾아와 귀국을 종용하자 10월 류홍석 등과 일시 귀국했으나 이듬해인 1898년 초봄 이소응·이필회·이정규 등과 함께 재차 요동 통화현 오도구로 망명했다.
1908년 류인석은 국외망명지로서 노령에 항국적인 항일기지를 구축해 국내의 항일의병에 무기를 지원 공급해 주며, 그 기지를 바탕으로 본토 수복을 모색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서한을 통해 지구전을 역설했다.
1910년 6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이범윤 등의 추대로 68세의 류인석은 13도의군 도총재에 추대된다.
13도의군은 이갑·안창호·이상설 등 계몽운동계열과 이범윤·유병렬·이진룡·홍범도 등 의병운동계열이 합류한 조직으로 의병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면서 구국운동도 함께 진행했다. 류인석은 7월 고종 황제에게 연해주로 망명하도록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류인석은 1910년 8월 일본의 병탄야욕이 드러나자 이상설·이범윤·김학만·차석보 등과 더불어 8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항일단체인 성명회를 조직했다. 성명회는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원한을 선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류인석은 이상설, 이범윤 등과 두만강 연안으로 진공하려고 시도했으나 일본의 농간으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15년 7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현재 류인석의 저서로는 소의신편, 화동속강목, 의암집이 있고,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이미지 전환 모색
올해부터 의암 류인석은 기존 '대유학자'에서 '의병대장'으로 이미지 전환이 시작된다.
춘천문화원은 올해 고증을 거쳐 의병대장의 이미지를 담은 전신 영정을 제작한다. 제작비만 9000만원이 소요될 예정이다. 또 가정리 생가 복원과 화약 제조창, 여의내골 의병훈련장 등을 복원할 계획이다.
앞서 류종수 춘천문화원장은 지난달 25일 서울 광복회관에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을 만나 춘천 가정리 의암 생가 복원과 의병훈련장 조성 지원을 요청, 연내에 생가복원 기공식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현재 의암 류인석 선생의 영정은 반신상으로 유건을 쓰고 책을 든 두루마리를 입은 유학자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의병대장 이미지에 부합하지 않는 만큼 고증을 거쳐 두건을 쓰고 창을 잡고 말에 올라 의병을 지휘하는 모습 등으로 그려낼 계획이다.
춘천시는 남면 가정리 의암 류인석 선생 유적지를 국가사적지로 지정하기 위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사적지 지정에 필요한 학술적 논거와 사전 종합정비계획을 마련키 위한 것이다.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적지로 지정되면 시설 보수 등에 국·도비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유적으로서 위상도 높아진다. 현재 류인석 유적지는 묘역을 중심으로 6만4천여㎡에 기념관, 의열사, 백범 김구선생 고유문비, 의병학교 등이 조성돼 있다.
'의병대장 류인석 장군'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춘천문화원은 의암 순국 100주년 기념사업 실무 T/F팀을 꾸린 상태로, 한상헌 부원장을 팀장으로 임명하고 사무국 2명과 의암유적지 2명 모두 5명이 참여하고 있다.
◆ 남은 과제
가장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성명 표기를 포함해 호칭을 통일하는 것이다.
현재 춘천문화원은 공식적으로 '의암 류인석 선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유인석'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하는 곳도 적지 않다. 처음으로 의병대장이 된 제천의 경우 '의암 유인석'으로 돼 있다.
춘천 역시 아직 '의암 류인석 선생'과 '의암 유인석 선생'이 혼용되고 있다. 여기에 '의암 유인석 장군'과 '의암 유인석 의병장'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당시 성씨에 있어 두음법칙을 적용해 '류'씨를 '유'씨로 표기토록 한 데서 비롯된 결과다.
성명 표기 이외에도 제천시와 협의해야 할 부분은 더 있다.
제천문화원은 19일 봉양읍 공전리 제천의병전시관에서 의암 유인석 선생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식을 가졌다. 류인석 선생에 대한 제천시의 인식은 '제천의병대장'이다. 제천은 전국 의병의 본산인 동시에 총사령부격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류인석 선생은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춘천문화원은 이에 대해 "제천의병으로 축소될 수 있는 지역적 한계성을 갖는 인식"이라며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제천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한 것은 맞지만 1910년 십삼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됐고, 성명회장을 맡는 등 지역적 한계를 벗어난 활동을 벌였다는 데 따른 것이다.
춘천문화원과 제천문화원, 제천시는 아직 이와 관련한 협의를 가진 적은 없다.
춘천시민들이 갖고 있는 대유학자의 이미지를 의병대장으로 전환하는 것도 숙제다.
그간 의암 류인석 선생의 이미지는 대유학자가 강조된 것이었다. 올해부터 의병대장 이미지로 전환하는 작업을 위해서는 '대유학자의 면모를 기본으로' 의병대장으로서 활동과 업적에 대한 평가와 그 결과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가 필수적이다. 춘천문화원 스스로 의암 류인석 선생의 이미지를 혼동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 의병대장 전신 영정을 제작할 계획이나 그외 류인석 선생 유적지에 세워진 동상 등도 교체해야 하는 만큼 이를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