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보험금 미지급 규모가 수천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생보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주지 않기로 담합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민원인들의 줄소송과 수십억원대의 과징금 부과 등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CNB=도기천 기자)
공정위, 생보사 12곳 담합 의혹 본격 조사
보험사, 민·관 상대 채무부존재·행정소송 맞서
주계약·특약 서로 달라…약관 해석 최대 쟁점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23일 CNB에 “생보사 전체를 상대로 담합여부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며, 상당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전했다. 담합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내부자 진술, 증거문건 확보 등이 이뤄져야 하는데 생보사들이 이를 감추거나 이미 없앴을 수 있어 조사에 어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카르텔(담합)은 대부분 법정에서 가려지기 때문에 우리가 확보한 자료의 증거력이 충분한 지가 최대 관건”이라며 “자료가 확보되더라도 담합과 관련된 증거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신중한 검토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전했다. 담합사실을 밝혀내고 과징금을 부과하더라도 행정소송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러 리스크를 감안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번 사태는 지난달 초 금감원이 생보사를 상대로 제기된 민원 39건(25억9300만원)에 대해 당사자와 합의해서 보험금을 지급하도록 각 생보사에 권고하면서 촉발됐다.
그러자 며칠 뒤 삼성·한화·교보생명 등 ‘빅3’를 포함한 신한·동부·동양·농협·알리안츠·아이엔지(ING)·메트라이프·현대라이프·에이스생명 등 생명보험사 12곳의 부서장급 이상의 간부들이 긴급회동을 가졌다.
공정위는 이 회의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느냐에 따라 담합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생보업계는 모임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담합 의혹에 대해서는 손사레를 치고 있다.
생명보헙협회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각 사가 각자 알아서 판단하기로 했다”며 담합사실을 부인했다. 한 보험사의 관계자도 “담합을 했다면 어떻게 일부 보험사는 사망보험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일부는 거부 했겠느냐”며 “보험사 마다 의견이 다 다른데 담합이라는 건 말이 안된다”고 밝혔다.
이 회의가 있은 후 에이스생명과 현대라이프생명 두 회사만 보험금을 지급키로 했고, 나머지 10개사는 지급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각 사별로 김앤장 등 대형로펌을 앞세워 계약자를 상대로 채무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 담합 의혹은 자살보험금 지급을 규정한 약관의 해석에서 비롯됐다. 대부분 보험사들이 특약조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얘기가 달라 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생보사들이 2001년 이후 판매한 종신보험 등의 상품에 나온 재해사망특약에는 가입 뒤 2년이 지나 자살한 경우, ‘일반사망보험금’의 두 배 이상에 이르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주도록 돼 있다. 대부분 생보사의 약관이 문구 차이만 있을 뿐 거의 같은 내용이다.
대법원이 2007년 이 문제로 제기된 소송에서 교보생명이 자살한 계약자에게 재해사망보험금을 주라고 판결하자, 생보사들은 약관 수정에 나섰다. 2010년 4월 이후부터 판매한 상품에 대해서는 재해사망보험금이 아닌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하도록 특약을 바꿨다.
보험사 관계자는 “현재는 주계약·특약 모두 계약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일반사망보험금을 지급토록 명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2010년 4월 이전에 판매한 보험 상품이다. 이 상품의 특약에는 계약 뒤 2년이 지난 후의 자살에 대해 재해사망금을 지급토록 하고 있지만 보험사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생보협회 관계자는 “특약도 결국은 주계약을 준용하는 측면이 있는 만큼 주계약과 특약이 서로 다른 부분에 대해 법원 판결을 받아 보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생보사들은 금감원의 과징금 부과에 대비해 행정소송을 검토하는 한편 민원인들을 상대로 이달 중순경 채무부존재 소송을 제기했다. 지급해야할 채무(미지급금)가 있는지 없는지를 법원에서 가려보자는 것. 금감원 분쟁조정국에 접수된 민원 30여건에 대해 유족들에게 소장을 띄운 상태다.
또 지난해 8월 금감원 종합검사때 560억원(428건)의 자살재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지난 7월 기관주의 경징계와 49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ING생명은 금감원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ING생명에 이어 과징금 부과가 확실해진 나머지 10여곳의 보험사들도 금융당국을 상대로 소송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김기준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최근 금감원으로부터 제출받은 ‘미지급 재해사망보험금 및 재해사망특약 보유 건수 현황’에 따르면 올해 4월 말 기준으로 미지급된 자살보험금은 2179억원에 달한다. ING생명이 653억원(471건), 삼성생명 563억원(713건), 교보생명 223억원(308건) 등이다.
시민단체, 보험상품 불매운동 돌입
생보사들의 이같은 집단행동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금융소비자연맹(금소연) 생명보험금청구공동대책위원회는 재해사망(자살)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생보사를 상대로 보험상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금소연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지급명령을 내렸음에도 이를 무시한 채 감독기관에 맞서고 있고 유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스스로 약속(특약)을 내팽게 친 비열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유족에게 특약대로 재해보험금을 지급한 한 보험사의 직원은 CNB에 “특약은 주계약을 보충·추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계약과 특약이 다르다고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된다”며 “당연히 특약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한편 공정위는 지난주 생명보험협회를 시작으로 21일 ING·삼성·한화·교보생명에 대한 현장조사를 실시한데 이어 조만간 나머지 생보사들에게 대해서도 전면적인 방문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협회와 개별보험사에서 확인한 자료를 토대로 본격적인 담합 여부 검토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만일 담합사실이 드러날 경우, 행정소송 결과와 상관없이 해당 보험사 전체에 수억~수십억원의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어 업계 전체가 촉각을 세우고 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