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는 서로 ‘네 탓 공방’을 벌이며 책임전가에 급급하고 있다. CNB가 온 국민의 시선이 쏠렸던 ‘김영란법’이 무산된 까닭을 따져봤다. (CNB=도기천 기자)
지방선거 앞두고 정치권 생색내기 급급
밀어붙이다 보니 법안에 ‘연좌제’까지 포함
뒤늦은 후회…‘네 탓 공방’으로 비난 피하기
국회 정무위원회는 27일 법안심사소위를 열고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 제정안(김영란법)’을 재심의했으나 일부 쟁점에 대한 시각차로 법안처리가 무산됐다.
이달 말 정무위원들의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법안은 후반기 국회 새 정무위원들이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이르면 6월에 임시국회가 열리더라도 논의가 원점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영란법은 공무원 내지 공공업무 관련자가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대가성이 없더라도 형사처벌을 받도록 하는 게 골자다.
이 법안은 2012년 김영란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 발의했다. 지난해 7월 국무회의를 통과해 정무위에 계류돼 있다가 세월호 참사 이후 ‘관피아’(관료 마피아)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으로 급부상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대국민담화 등을 통해 수차례 조속한 처리를 당부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는 선박의 안전점검·관리 등과 관련, 해양수산부와 산하 단체들 간의 유착관계가 논란을 빚고 있다. 해수부 퇴직 관료들이 낙하산으로 내려간 한국선급과 해운조합 등 관련 단체의 각종 부실·비리, 안전불감증이 세월호 참사의 배경으로 지목되고 있다.
한국선급의 경우 전직 관료 출신 10여명이 경영진으로 재취업한 상태다. 한국선급은 정부대행 선박 안전검사를 담당하는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국내 선박의 등급을 매기거나 품질검사를 독점해오고 있다. 선박안전기술공단 등은 전직 관료들의 대표적인 재취업 자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꾸려 해운업계의 구조적인 비리를 캐고 있다
여야, 선명성 경쟁에 법리 ‘뒷전’
이런 가운데 김영란법은 공직자의 윤리성을 크게 높일 수 있는 대안으로 부상했다. 이 법안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내비쳤던 새누리당도 원안 수용 의사를 밝히며 전향적으로 돌아서면서 법안 통과 기대감이 커져 왔다.
여야는 지난 21일 대가성이나 직무관련성이 없어도 공직자가 100만원 이상의 금품을 받았을 경우 처벌토록 한 국민권익위원회의 입법예고안(원안)을 그대로 수용키로 합의했다.
그동안 새누리당은 정부 수정안, 야당은 원안 수용을 주장해 왔다. 수정안은 직무 관련성이 있는 금품수수만 형사처벌하고 나머지는 과태료만 부과하는 방식이다. 원안은 직무 관련성 여부를 따지지 않고 100만원 이상의 금품을 챙긴 모든 공직자를 처벌하자는 안이다.
이에 따라 23일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열렸다. 하지만 몇몇 쟁점을 두고 여야가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대가성 여부와 상관없이 100만원 이상 금품을 받은 공무원에 대해서 형사 처벌하자는 데는 대체로 공감대를 이뤘지만, 김영란법 적용 대상을 어디까지 넓힐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다.
여야간 책임공방도 계속돼 왔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기식 의원은 “일부 여당 의원의 반대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지만, 법안심사소위원장인 새누리당 김용태 의원은 야당의 정치공세라며 반발했다. 김 위원장은 “쟁점이 되는 부분에서 원칙적으로 합의를 해놓고 뒤에서 여당이 반대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여야는 27일 소위를 재개해 최종 합의를 시도했지만 결국 ‘공수표’가 됐다.
우선 소위는 주요 쟁점이었던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는 공직자의 범위를 국·공립학교뿐 아니라 사립학교, 사립유치원으로 확대하고 KBS·EBS뿐 아니라 모든 언론기관 종사자로 확대하자는데 까지는 합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경우 직접 대상자 수는 186만명에 해당하며 이들의 가족을 포함할 경우 최소 550만명에서 최대 1786만명 가량이 해당된다.
소위는 또 핵심 쟁점인 ‘직무관련성’ 문제와 관련, 대가성 및 직무관련성이 없더라도 공직자가 100만원 이상의 금품을 수수했을 경우 형사처벌하도록 하는 국민권익위원회의 입법예고안을 수용키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소위는 이해충돌 방지 장치와 관련, 국민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고 국민청원권과 민원제기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해법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해충돌 방지제도’는 공직자가 자신 또는 가족, 친족 등과 이해관계가 있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내용이다. 법안에서는 공직자의 사적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직무수행 범위와 관련해 예외사항을 가려낼 수 있는 제척·회피 조항이 구체화되지 않아 추가 논의가 필요한 상태였다.
즉, 현 상태로 법안을 제정하면 국가의 모든 사무·정책을 관장하는 국무총리, 국회의원, 장관 등 포괄적 직무관련자의 가족은 이론상 직업을 가질 수 없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김용태 법안심사소위원장은 “가족에게도 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 경우 헌법에서 천명한 ‘연좌제 금지’에 저촉된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향후 법안처리와 관련 “이 법안이 제정법이기 때문에 합의한 내용만 처리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다”며 “후반기 법안심사소위에서 상반기 소위 위원들의 합의안을 반영하도록 권고키로 했다”고 말했다.
이달 말 정무위원들의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하반기에 새로 구성되는 정무위원회가 합의안을 수용토록 하겠다는 것. 하지만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논의가 원점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한편에서는 이해 당사자인 여야 의원들이 애초부터 법안 처리에 소극적이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법안이 제정되면 이른바 ‘입법 로비’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는 점에서다.
지난 2010년 전국청원경찰친목협의회가 정치권에 후원금을 내며 청원경찰법 개정에 영향을 끼친 이른바 ‘청목회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또 지난해에는 경제민주화 법안과 관련, 경제5단체가 국회를 상대로 ‘처리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압력을 가하자 입법로비 논란이 일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김영란법이 통과되면 합법적인 후원금이라 할지라도 직무연관성이 있을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기업의 소액후원 등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뿐만 아니라 지역민원 해결을 빌미로 주민단체 등이 후원금을 내는 관행도 사라지게 돼 의원들이 밥그릇이 위태로워지게 된다”고 귀뜸했다.
한 중진의원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서두른 경향이 있다. 차분히 시간을 갖고 법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지를 먼저 따졌어야 옳았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