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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 교수의 공연예술산책

뮤지컬 명성황후의 대구공연 승부사, 고도예술기획 김종성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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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락현기자 |  2014.05.19 10:57:21

▲고도예술기획 김종성 대표.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뮤지컬 명성황후에 관련된 분들도 제가 대구에서 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돈 좀 날릴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작년 12월.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를 30일 장기공연으로 대구에 유치한다고 했을 때 공연기획자들은 손실을 크게 볼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미친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현란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대구 문화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명성황후에 더 이상 잠재된 관객이 없다고들 했고, 창작뮤지컬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것도 20년가량이 된 뮤지컬명성황후 흥행을 점치는 기획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 한 사람의 공연기획자의 시선은 달랐다.


뮤지컬 명성황후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한판 승부를 만든 고도예술 기획 김종성 대표(49)는 이렇게 설명한다.  “난 공연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은 미쳤다고 했죠.  수억을 쏟아 부어서 흥행이 안 되면 쫄딱 망하는 겁니다. 성공할 것이라고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뮤지컬 명성황후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밀어 붙인 겁니다. 결과는 이겼습니다. 관객 점유율 85% 이상이 됐고, 한 마디로 초대박 이였습니다.” 


일부 서울 공연시장의 전문가들도 그를 보고는 돈키호테형 기획자라며, 미쳤다고 했다. 전국을 쓸고 있는 대형뮤지컬에 비해서 지나간 창작뮤지컬에 관심을 보일 관객은 없다는 논리였다.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아마, 뮤지컬명성황후 관련된 분들도  제가 대구에서 한다고 했을 때 속으로 돈 좀 날릴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작년 연말, 승부사 기질은 적중을 시켰다. 한, 일 외교문제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냉각기 상태였고, 독도문제나 정신대 할머니들 문제는 국민들을 더 자극시키고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하잖아요. 일본이 민비를 잔혹하게 죽인 이 여우사냥의 잔혹사는 뮤지컬로 우리 국민들한테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과서는 세월이 흘러도 교과서 인겁니다. 우리국민이라면 다들 봐야죠. 시기적으로 운도 좋았지만, 역시 우리 관객들은 잔혹한 우리의 역사를 잊지 않으신 겁니다” 


4만 명 이상을 관람시킨 차가운 승부사의 이미지는 그를 보면서 빛나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동네 지하철역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두 리 번 거리며 그를 찾고 있는데 낡은 무쏘 승용차 한 대가 도로 옆으로 섰다. 온통 빨간색으로 외형을 치장한 차는 그가 가장 아끼는 애마다. 승용차 외형은 온통 뮤지컬 명성황후 안내문구와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다. 움직이는 광고판을 만들어 놨다.


그의 차는 12월로 멈추어져 있었다. “이 차를 봐봐. 작년에 명성황후를 기획하면서 차 외형을 새롭게 도색을 하고, 잘 생긴 광고판을 만들었잖아. (차를 탁탁 친다) 다들 미쳤다고 날 인정하지 않았어.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작년에 공연을 해서 수익을 좀 많이 남긴 기획자는 내가 유일해. 하하하. 진정한 승부사는 숨어있는 거지 밖으로 들어내질 않아. 밖으로 보여 지는 기획자는 하수야” 


쉴 새 없이 브로드웨이에서 날아오는 뮤지컬들이 공연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청년 나이가 다 되어가는 창작뮤지컬 명성황후가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둘이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굵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키가 176㎝에 소리는 미성이다.


얼굴은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수룩해 보였다. 예상은 비켜갔다. 한마디는 단호했고, 그가 유치하려고 하는 작품을 말 할 때는 고집스러움과 확신에 가득 찼다. 말을 옮길 때는 그의 미성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어려서는 사극 조선왕조 5백년을 즐겨봤다.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사극에서 해설을 하는 성우의 이름도 김 종성 이였다. 사극이 끝나고 자막에 성우 김 종성이 보일 때면 자신도 성우가 된 것 같았다. 그때부터 성우 김 종성의 소리를 들으며 어린 김 종성은 성우 꿈을 키웠다.


물었다. “성우나 연극배우가 안 되고 공연기획자가 더 잘 어울린다. 안 하길 잘 한 것 같다”  그가 몸을 뒤틀었다. 성우는 그의 꿈 이였다. 한 번 도전하고 말았다. 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했다. 연극배우나 성우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선택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이다. “선택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 말을 성우 톤으로 흉내를 냈다. 웃음이 터졌다.

▲고도예술기획 김종성 대표


물 한잔을 마시고는 뮤지컬 명성황후 얘길 꺼냈다. “대형 뮤지컬 유치는 돈과 연관된다. 판단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명성황후 광고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 올인 한 거다. 영상 하나도 쉽게 만들지 않았다. 무모한 도전이라고 했다. 나는 확신을 가졌다. 작년 한 해 동안 독도문제와 한·일 역사문제가 심각해 졌다. 역사문제를 꺼내야겠다고 판단했다. 뮤지컬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작품은 뮤지컬 명성황후가 유일하다”


“운도 좋았지만 관객들의 참여는 놀라웠다. 그 만큼 우리 관객들의 민족성은 가슴 깊이 박혀있는 것이다. 작품도 좋다. 공연을 보면서 껄끄러운 역사문제를 자연스럽게 가슴에 담는 것이다. 직원들도 8개월 동안 이 작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공연홍보도 빈틈을 보이질 않았다. 1년을 명성황후만 생각한 결과다”


큰 도박이다. “도박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만석이 되어서 관객들이 공연에 빨려들 때 기획자로서 그 광경을 봤을 때 최고의 희열을 느끼게 하게 해준다. 기획자의 인생이다. 리스크가 큰 것은 사실이다. 기획자는 대박의 꿈을 마음에 품는다. 손실이 있지만 대박을 향해서는 직진을 하는 거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웅성거렸다. 혼자만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뮤지컬 명성황후와는 인연이 깊다. 그동안 세 차례 공연을  했는데 다 대박 이였다. 10주년 때는 고급스러움으로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했는데 성공이었다.  2008년도 공연은 계명아트센타 개관기념공연으로 했다. 극장환경이 새로운 명성황후를 만들어 냈다. 작년 연말 공연은 일본과의 역사적인 외교문제가 연관됐다. 한, 일 역사문제를 집중적으로 부각을 시켰다. 초·중·고 학생들이 극장을 채웠다. 선생님들도 공연을 보라고 추천해주셨다. 지방에서 창작뮤지컬을 장기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미친 짓 이다. 기획자는 그 미친 짓을 성공시켜야 비로소 획을 긋는 공연기획자가 될 수 있다. 그 맛에 하는 것이다” 


한·일 역사문제를 부각 시킨다고 해서 많은 관객들을 움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철저한 분석과 준비가 필요하다. 대형 뮤지컬을 유치하려면 많은 돈이 들어간다. 공연이 망하면 기획자도 망하게 된다. 큰돈이 들어가면 재기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많은 기획자들은 안전한 공연을 선호 한다. 난 그것을 뒤집고 싶었다. 공연이 끝날 때 까지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직원 세 명과 전투적으로 이 작품에 매달렸다. 출연한 배우들도 좋았다. 원년멤버 이태원씨가 출연했고, 오페라의 유령 크리스틴 역으로 알려진 이혜경 씨가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여주었다. 다른 배우들도 최고의 캐스팅 이였다. 윤 호진 선생도 대구공연에 영원한 명성황후가 될 수 있다는 승부를 던진 거였다. 대구 공연시장을 놀라게 만든 사건이 됐다. 우리가 승리한 게임이 된 거다.직원들은 올해 7월까지 다들 유급 휴가를 보냈다. 진정한 승부사는 규모와 멋으로 승부하질 않는다” 


성격적으로 그런 과감한 승부사의 기질이 보이질 않는다. “난 성격적으로 사람을 모으는 일이 재밌다. 승부의 근성은 밖으로 들어나는 게 아니다. 그냥 체질적으로 잠재되어 있어야 한다.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사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직장인들이 스트레스와 고민 속 에서 살아간다.  공연을 통해서 그 스트레스를 풀고 충전해야 한다. 그게 공연의 기능이다. 공연기획은 그런 측면에서 참 매력적인 직업이다. 기획은 현대인들의 힘든 정신세계를 치유하는 정신과 의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연문화로 말이다”  


그가 진지해 졌다. 흥행이 빛나간 작품도 있었나. “탤런트 고두심씨가 출연한 ‘댄스래슨’는 망했다. 돈도 조금 날렸다. 이 작품은 서울에서는 대박이 난 작품이다. 2틀 4회 공연을 했는데 관객이 들질 않았다. 고 두심 선생의 연기도 정말 뛰어나다. 예술성도 좋은 작품이다. 그런데 대구 관객들은 국민엄마 이미지를 그대로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 국민 어머니가 연극을 통해서 사교춤을 배우는 이미지가 어필이 안 된 것 같다. 지역별 정서와 문화는 조금씩 다르다. 관객들은 영원한 고두심 씨의 이미지를 그렸을 것이다”  


그는 95년도에 극단 ‘고도’를 만들었다. 연극을 시작한 것은 86년도에 극단 ‘대구무대’에 입단을 하면서다. 처음 출연한 작품은 ‘석풍이 불어오면( 김상렬 작, 조기영 연출)’이였다. 제 3회 대구연극제 출품작인 이 작품의 첫 역할은 단역 이였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연극과 씨름하면서 기획자로써의 기질을 키웠다. 연극제작 환경은 어려웠다. 연극을 하려면 제작비가 필요했다. 공연으로 대박을 터트려서 그 돈으로 하고 싶은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 80년대 후반에도 몇 편 공연기획을 했지만 97년부터 본격적으로 기획자의 길을 걸었다. 


첫 연극을 하던 시절로 돌아갔다. “방학 때 대구로 내려와서 연극과 기획을 배우게 됐다.  그 시절  연극은 사실 춥고 배고픈 예술 그대로였다. 현장은 연극교과서가 아니었다. 배우를 하고 싶었는데 지역 연극 환경은 무대에 설 자리가 많지 않았다. 제작활성화가 안되어 있던 시절 이였다.  연극배우로써의 길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다. 연극을 하려면 제작, 기획을 제대로 해야겠구나 생각 했다. 방향을 바꾼 것이다” 


1년에 7-8편의 공연 기획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길로 총 120여 편을 제작하고 기획을 했다. 첫 기획공연은 91년도 극단 춘추 작품 <얼리 걸>이였다. 문고헌 연출의 이작품은 대구에서 보름 공연을 했다. 전회매진을 기록했다. “출발이 좋았다. 전석 매진 이였다. 이 작품이 창녀들의 삶을 다룬 작품 이였다. 수영복을 입고 나오는 장면도 있었는데 파격적 이였고, 특별한 삶의 이야기가 어필이 된 것이다. 작품도 좋았다”


기획자로 첫 작품을 끝낸 그는 탄력을 받았다. 92년도에 두 번째 기획을 하게 된 극단 ‘사하’의 <장희빈>도 성적표가 좋았다. 그가 안경을 고쳐 쓴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내 연출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고는 전화를 건다. “연극 장희빈 연출이 누구였지? 그래 송종섭 연출이다” 


의욕이 앞섰다. 작품에 출연만 하는 배우가 아니라 직접 돈을 투자해야 하는 기획은 위험성이 컸다. 젊은 나이에 그의 인생을 걸었다. 여기저기 돈을 빌려준 것이 회수가 안됐다.  93년도에는 연극 북어대가리를 기획하려고 했다. 구두로 계약을 했다. 공연제작사 사정으로 무산됐다. 실패를 맛 봤다. 그의 인생은 녹녹치 않았다. 공연기획 일을 잡시 접어야 했다. 돈 때문이 이였다. “사람들이 싫어 진거야. 돈 관리가 제대로 되질 않으면 좋은 공연도 성공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회의감이 밀려오는데 다 싫어졌어요”
    
그가 턱을 괴고는 머뭇거리더니 팔짱을 낀다. “기획이라는 것이 뜻대로 되질 않아요. 생물 인거죠.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데 마음이 저와 같아지질 않아요. 기획이 어렵게 느껴졌어요”


2년 동안의 쉼은 그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극단 ‘고도’를 창단해서 직접 제작과 기획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동극으로 눈을 돌렸다. 1년에 세계명작동화 이야기를 아동극으로 만들어 제작을 수 십 편을 했다. 기획자로써 체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아쇼핑 비둘기 홀을 365일 임대 운영을 하면서 아동극 공연을 했다. 극장 안은 어린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얼어붙은 마음은 열기기 시작했다. 연극 코미디클럽, 따라지의 향연, 출세기, 방황하는 별들 등을 불러오면서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공연기획은 쉽지 않았다. “연극으로는 흥행을 시키기에 정말 힘들었어요. 기대를 많이 했는데 큰 폭으로 적자를 많이 보게 됐어요”


마음은 타들어갔다. 물러설 수 없었고, 마지막 승부를 던져야 했다. “삼세판의 마음으로 배우 윤석화 씨가 출연하는 신의아그네스에 기획자로 승부수를 던졌어요. 이 작품이 큰 성과를 거둔 겁니다”    


1700석 규모의 대구시민회관에서 2틀 4회 공연으로 올린 ‘신의 아그네스’는 6000명 가량이 몰렸다. 관객 점유율이 90%를 넘겼다. 대 성공 이였다. 당시 대구 공연시장의 지도가 형성되어가는 단계였다. 


주류를 형성하는 기획단체는 분도예술기획, 성우기획, 한세기획이 주도했다. 특히 분도예술기획의 윤순영 대표(현 대구 중구청장)가 대구로 유치한 ‘빠담빠담빠담’, ‘겨울 나그네’ 등은 초대박을 내면서 대구가 공연문화 시장으로 성장 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심었다. 기획자들의 손에 의해 대구는 대중적인 공연시장을 형성해 나갔다. 대구에서 공연을 하면 흥행에 무조건 실패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된 시절 이였다. 보수적인 도시의 관객들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연시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2004년 뮤지컬 ‘맘마미아’는 대구시민 뮤지컬이 됐고, 뮤지컬 도시로 이어졌다. 뮤지컬이 대구를 강타 할 때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 가족 뮤지컬 ‘ 사운드 오브 뮤직’을 기획했다. “공연을 제작한 단체가 부도가 났어요. 극장에 올리지도 못하고 앉아서 큰 손실을 봤어요. 수 억 원을 날린 겁니다.  회의감이 밀려왔어요. 공연기획을 안하기로 다짐을 했어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돈도 바닥이 났다. 물러 설 수도 없었다. 기획자의 체질은 버릴 수 없었다. 마음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연극 라이어와 인연을 맺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재기에 성공을 했다. “틈새 공연시장을 노렸어요. 투자와 손실이 클 수 있는 작품보다는 실패를 봐도 감당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게 됐는데요. 연극 라이어가 성공 한 겁니다. 작품이 끝날 때 까지 웃으면서 극장을 나가게 되는 연극 이예요. 열 번 이상 본 관객도 있을 정도예요.”   

▲고도예술기획 김종성 대표.


2005년도부터 대구에서 꾸준하게 공연되고 있는 이 작품은 효자 상품이 됐다. 지금까지 유료관객 15만 명이 이 작품을 봤다. 물었다. “라이어의 성공 이유가 뭔가?”


빠르게 말을 받는다. “탄탄한 구성이다. 시종일관 웃음코드로 재밌게 잘 만들어진 연극이다. 다른 기획자들은 이 작품을 외면했다. 난, 될 수 있다고 확신을 했다. 적중한 것이다.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피곤하다. 쉬어야 하고, 스트레스를 날리고 싶어서 극장을 찾는다. 웃음의 반전이 기가 막히다. 진정한 코미디 연극이다. 작품이 재미있으니까 관객들은 극장을 찾게 된다. 그게 성공한 거다. 소극장 연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으로 시장을 형성 한 것이다” 


연극 라이어의 성공으로 소극장 연극문화가 더 활성화가 됐다. 시티극장, 하모니 아트 홀, 송죽 시어터, 아트플러스1,2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대구의 소극장연극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나. “동성로에 20개 이상으로 소극장이 더 생겨야 한다. 대구가 공연예술중심도시가 되려면 공연장 인프라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젊은 관객들이 시내에 나와서 연극 공연에 관심을 갖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야 한다. 동성로가 문화특구로 지정되어서 신축되는 건물에는 반드시 문화공간과 연극극장이 만들어져야 활성화가 된다. 6개의 소극장으로 턱 없이 부족하다. 대학로의 5%수준이다. 규제가 풀리고 정부나 시에서 현실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규제 푸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감상적이다. “건축주들의 생각도 중요하다. 문화공간을 다양하게 수용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특수문화 환경을 조성해 주면 좋겠다. 지자체나 정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임대사업에도 효율적일 것 같다. 대학로는 150여개 소극장이 있다. 임대업도 활성화되어 있다. 소극장 공연이 활성화가 되어야 오페라, 대형뮤지컬, 연극 등으로 접근이 더 쉬워진다.”


커피숍 아르바이트생이 구부정하게 다가왔다. 마감시간을 넘겼다는 신호다.


밖으로 나와서 돌계단에 앉았다. 지자체의 공연문화 지원이 아쉬운 것 같다. “대구가 뮤지컬과 공연예술도시가 되고 있지만 대구에는 다양한 공연문화가 존재한다. 기획단체는 상업적이다. 그러나 공연예술도시답게 신사적으로 행정적 지원을 해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가로등 배너는, 지자체에서 행사를 하면 달수 있는데 기획단체는 못한다. 규제를 완화해서 라도 풀어야 한다. 협동적인 축제 분위기를 만들 때 공연예술중심 도시가 된다”
 
10년 전에 비해서 대구의 공연문화가 성숙해 졌고, 뮤지컬과 공연예술도시로 색이 변화되고 있지 않나. “공연시장은 활성화 됐다. 대구시장의 공연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수익 사업을 하는 할 수 있는 문화 예술 공사를 대구에 설립해야 한다. 아시아 브로드웨이로 가야 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공사로 영입해 다양한 작품이 개발되고 지원을 해야 한다. 철저히 시장논리에 맡길 수 있도록 말이다. 대구 뮤지컬 공사가 활성화 되면 우리지역이 전국 문화시장의 집합 단체가 된다. 서울로 수출을 할 수 있고, 중국과 아시아에 수출을 할 길이 열리게 된다.  5년 후에는 중국이 아시아에서 최고의 문화시장으로 될 것이다”


차 앞으로 걸었다.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반짝거리고 있었다. 작품이 아직도 공연되고 있었다.


 “대구에서 라이어와 몇몇 작품이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뮤지컬 명성황후는 대구 관객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너무 감사하고 고마운 작품이다. 고도의 꿈은 좋은 공연으로 대구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기획사로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표정은 들떠 있었고, 작년에 치른 공연홍보의 전투적인 시간이 피곤했는지 말은 툭툭 끊겼다.


뮤지컬 배우와 연출 중 기획자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연한 대답이 되 돌아온다. “기억에 남은 배우는 이태원 씨다. 연출은 대한민국 창작뮤지컬을 활성화 시킨 윤 호진 대표를 가장 존경한다. 한국 뮤지컬의 자존심을 지킨 분이다” 


새벽바람이 차가워졌다. 그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는 핸들을 돌렸다. 달리는 차들 중 유독 빨간색으로 도색한 그의 차에 새겨진 뮤지컬 명성황후는 반짝거렸다.  

▲김건표 교수.


● 김건표 교수(대경대학 연극영화방송학부)는 연극·뮤지컬·공연문화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아 공연분석을 통한 리뷰를 써오고 있으며, 인터뷰 전문 칼럼리스트다.  방송, 신문언론을 통해 600여명이 넘는 스타, 전문가, 공연예술가들의 인터뷰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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