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 김영환, 박몽구, 나해철, 유종순, 이적, 서홍관, 박철 시인 등, 지난 1980년대 춥고 어두웠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민중시의 시대를 활짝 열어제쳤던 문예일꾼들이 그동안의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우리 문단을 뒤흔드는 제법 큰 사고(?)를 낼 모양이다.
이들은 지난 10월 20일 저녁 6시 30분, 원로시인 김규동 선생을 모시고 1980년대 활발한 시작활동과 민족민중운동을 펼쳤던 여러 시인들과 함께 서울 북촌 e-믿음치과에서 '제1회 시낭송회'를 가졌다. 이들은 이날 모인 시인 이은봉, 강세환, 전무용, 전기철, 임동확, 공광규, 박민규, 김이하, 박광배, 문학평론가 한명환 등과 함께 21세기 시의 나아갈 방향과 시인들의 자세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이날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동안 우리 문단은 특정 문예지를 중심으로 한 파벌과 섹트주의가 넘쳐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들은 21세기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동체적 정체성 회복이 중요하며, 역량 있는 시인들이 맘껏 시를 발표할 수 있는 공간과 지면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따라서 이들은 시낭독모임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시대의 시인들'이란 시낭독모임이 필요하며, 시인들의 발표지면을 위해서는 시인 개개인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새로운 계간 문예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을 모았다. 내년 초에 새롭게 선보일 계간 문예지 이름은 <시와문화>. 발행인은 문학평론가 김명환, 편집인은 시인 이적, 주간은 시인 박몽구, 편집위원은 시인 김창규가 맡았다.
■ 21세기 시는 거친 눈물 깊이깊이 흘려야 한다
"정실과 파벌, 섹트주의를 벗어나 역량 있는 시인들이 마음껏 정신의 뜰을 함께 가꾸어나갈 공간을 만든다는 취지로 기획된 시낭송모임 '우리시대의 시인들'이 제2회를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특정한 문학적 견해나 파벌을 만들지 않으며, 우리 시의 올바른 방향과 미래를 점검하는 조사 연구도 벌여나갈 것입니다." -팸플릿 '인삿말' 몇 토막
시낭독모임 '우리시대의 시인들'(대표 김창규)이 오는 7일(목) 저녁 7시, 서울 종로구 동숭동 '짚풀문화회관'(관장 인병선)에서 '제2회 우리시대의 시인들 시낭독회'를 연다. 이번 시낭독회는 80년대 시인들의 보다 활발한 창작활동과 발표에 따른 여러가지 사업계획 수립과 계간 문예지 '시와문화'의 창간을 탈없이 이루기 위한 재점검의 자리.
김창규(시인) 대표는 "지난 10월 첫 낭송회를 열어 그동안 시의 소통에 목말라 있던 많은 시인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며, "80년대 시인들은 이제 사오십대로 접어든 중견시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이 낭송회를 주춧돌로 삼아 문학기행, 문학심포지움, 문학학교, 문예지 창간 등 21세기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 디딤돌을 놓고 있다"고 5일 밝혔다.
이번 시낭송에는 이기형(89) 시인을 초대시인으로 홍일선(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나종영, 전무용, 이학영, 임동확 시인 등이 새롭게 창작한 자작시를 낮게 깔리는 음악에 맞추어 읽는다. 이어 토론 주제는 제1회 시낭송회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문학의 활성화와 민족문학의 개화'이다. 발제는 대구의 김용락(경북외대 교수) 시인이 맡았으며, 토론은 참석 시인 모두.
"우리 사회의 모든 일하는 현장, 또는 인간의 고민과 사유와 노동이 투입되는 모든 접점에서 그에 맞는 문학적 형태와 내용을 추구한 작품들이 다종다양하게 발현되어 우리 사회의 문학적 기준이 되고 예술적 관심을 매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도 시가, 인간으로서의 너와 나를 잇는 뜨거운 감동의 그것이라면. 여전히 시는 눈물을 흘려야 한다. 거친 눈물을 더 깊이깊이 흘려야 한다.” -박관서 시인의 '제1회 주제발표' 몇 토막
■ 인터넷시대, 시인들 시 발표 공간·지면 찾기
김창규 대표는 "인터넷의 확산과 소통방식의 다양화, 각종 정보통신 기기 및 매체의 발달, 문화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 등 사회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엔터테인먼트화한 문화 콘텐츠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급격한 상업화의 길로 치달으며 많은 새로운 문제를 양산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김대표는 "겉으로는 화려하고 풍성하며 일견 윤택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러한 상업화가 실제로는 내용의 빈곤과 함께 계층 간 세대 간의 단절 등 소통의 부재, 말초적 유희에 탐닉하는 도덕적 타락 등 표피문화 일색으로 흐르고 있다"며, 이는 "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인 1만명 시대라고는 하지만 정작 사람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시다운 시는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라고 곱씹었다.
내년 초에 새롭게 창간되는 '시와문화' 주간을 맡은 박몽구 시인은 "지금 모두 250종이 넘는 문예지가 있지만, 모든 문예지가 몇몇 사람 중심의 동인지 형태로 섹트화하고 있으며, 문예지 간 소통도 거의 미미한 실정이다"며, "이러한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문인은 비단 '우리시대의 시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단의 시인 작가들이 느끼고 있는 문제의식"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행사의 진행을 맡은 박민규 시인은 "일반적으로 초청 시낭송회가 아니라면 시인들이 주도하는 시낭송회는 대개 모임주체들의 발표의 장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며, 하지만 "'우리시대의 시인들'은 모임구성원들의 발표를 줄이는 대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모든 시인들의 동참을 호소하며 발표의 장을 열어놓았다"고 덧붙혔다.
■ 새로운 계간 문예지, 문단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들의 말처럼 80년대 시인들의 앞날에 무지개빛 희망만 가득찬 것은 아니다. 시낭송회는 밑돈이 크게 들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뜻만 하나로 똘똘 뭉친다면 오래 이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한동안은 비록 그 시낭송회가 독자가 없는 자화자찬의 어슬픈 자리가 될지라도 이를 거리 시낭송회, 거리 시화전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계속 이어나간다면 독자들도 결코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데, 문제는 계간 문예지 <시와문화>의 창간이다. 계간 문예지를 오래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원고료, 제작비, 서점 배포망, 정기구독자 확보 등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를 쉽게 이루기는 그리 쉽지 않다.
요즈음 들어 출판가와 서점가는 '단군 이래 최대의 불황'이라 되뇔 정도로 밑바닥에서 헤메고 있다. 출판사나 서점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책을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을 친다.
이러한 때에 인터넷 문예지도 아닌 종이로 만든 계간 문예지를 지속적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들은 <시와문화> '창간의 변'에서 개인 소유의 계간 문예지가 아닌 공동제 소유의 계간 문예지를 지향한다고 못박는다. 이는 곧 뜻을 같이 하는 시인들을 후원자 혹은 정기구독자로 참여하게 만들어 잡지의 생명을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하겠다는 것.
박몽구 주간은 " 적잖은 문학 잡지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중도하차하고 있다"며, "그것은 반드시 자금상의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라고 못박는다.
박주간은 "계간 <시와문화>는 소액의 기부금제를 통해 시문화 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소통의 문학을 추구한다"며, "남몰래 혼자 창작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종내는 문학을 포기하는 문우들도 적지 않다"고 덧붙혔다.
아무튼 지금은 이들 80년대 시인들의 발걸음을 눈여겨 지켜볼 때다. 이들 시인들이 그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도 민중시의 시대를 활짝 열어제친 시인들이라는 점을 살펴볼 때 이들의 앞날이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들 시인들이 하루빨리 문단의 물신주의와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소외된 시인들을 끌어안아 공동체 문단을 이끌어나갈 그날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