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 개혁 핵심은 ‘소유·경영 분리’
애플·구글 같은 선진국형 체제로 전환
경영은 전문CEO, 대주주는 감시 역할
국내 재계에 신선한 충격…파장 커질듯
“오너가 아니어도 가치를 극대화하는 준비된 리더가 그룹을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곧 가치경영이다”
HS효성 사령탑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긴 조현상 HS효성그룹 부회장이 평소 강조했던 말이다. HS효성은 지난 9일 김규영 전 효성그룹 부회장을 회장에 선임했다. 효성가(家)가 60년 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재계는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CNB뉴스=도기천 기자)
조현상 부회장은 효성그룹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의 손자이자 40여년 간 효성을 이끌었던 고 조석래 회장의 3남이다. 오너가 3세인 그는 지난해 7월 효성그룹에서 독립해 HS효성그룹을 출범시켰다. HS효성은 첨단소재·AI·데이터솔루션·모빌리티 등 첨단산업을 일구는 기업군이다.
따라서 ‘전문 리더가 기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조 부회장의 평소 지론과 ‘첨단기업 HS효성’이 요구하는 전문인재 중용이 맞물려 자연스레 전문경영인 시대가 열리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에서는 과거 효성가 형제들 간에 벌어진 경영권 분쟁이 이번 혁신에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도 나온다. 효성그룹 3세인 조현준·조현상·조현문 3형제는 후계와 경영권을 두고 경쟁하며, 협박·고발·폭로 등 수년에 걸쳐 다툼을 벌인 바 있다. 후대에는 이런 흑역사가 반복돼선 안된다는 조 부회장의 개혁 의지가 반영됐다는 해석이다. 전문경영인 체제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투명성·전문성이 강화되기에 경영분쟁 여지를 크게 줄일 수 있다.
‘효성 샐러리맨 신화’ 김규영은 기술경영인
이번에 HS효성 수장 자리에 오른 김규영 회장은 효성의 주력 사업을 이끈 대표적인 기술경영인으로 꼽힌다. 2017년부터 8년간 효성그룹 지주사 대표이사를 역임한 뒤 고문으로 물러났다가 이번에 HS효성 회장으로 복귀했다.
1948년생인 그는 한양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하고 1972년 효성그룹의 모태인 동양나이론에 입사해 53년간 재직한 ‘효성맨’이다. 평사원에서 사장, 회장까지 올라 ‘샐러리맨 신화’로 불린다. 언양공장장, 안양공장장, 중국 총괄 사장, 효성그룹 최고기술책임자(CTO) 겸 기술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김 회장은 국내 기업 최초로 스판덱스 자체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효성을 이 분야 글로벌 1위로 성장시킨 대표적인 기술경영인으로 평가된다. HS효성 측은 “누구든 역량을 갖추면 그룹의 회장이 될 수 있다는 조현상 부회장의 평소 지론이 김 회장 선임에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趙-金의 이상적 모델은 ‘머크식 경영’
조 부회장과 김 회장이 추구하는 전문경영인체제의 이상적인 모델은 독일 제약 회사 ‘머크’의 경영구조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평소 조 부회장이 “창업자 가족 등 대주주와 전문CEO가 서로 협력하며 기업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머크의 지배구조는 가장 선진적인 가족경영 형태로 꼽힌다. 1668년 프리드리히 머크가 창업한 이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약사로, 창업 때부터 지금까지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족경영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머크는 경영과 소유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고 대주주 일가는 감독만 하는 구조다. 전문경영인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 하에 자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한다. 주요 경영진 가운데 머크가(家)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HS효성의 경우, 조 부회장 일가의 지배력이 여전히 높은 편이다. 가령 핵심 계열사인 HS효성첨단소재는 지주사인 HS효성의 지분이 24.82%, 조 부회장 개인 명의 지분이 22.53%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 대주주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면서 전문경영인에게 힘을 실어 주려면 머크식 지배구조가 대안이 될 수 있다.
HS효성이 머크식 지배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국내 재벌 대기업 중에는 최초의 사례로, 재계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특히 기업지배구조 자문기관인 (사)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국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에게 오너 중심 지배구조를 개선할 것을 권고한 상황이라 재계는 촉각을 세우고 있다. 기업거버넌스포럼은 최근 삼성전자에 “지배주주가 없는 애플·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선진국형 전문경영인 경영체제로 전환을 준비할 시점”이라고 권고한 바 있다. 경영은 전문경영인이 맡고 대주주들은 이사회를 통해 이를 지원하는 선진화된 지배구조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권고의 배경에는 국내 재계에서 오너 일가 지배구조의 부작용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점이 작용했다.
실제로 지난 광복절 특사로 사면된 주요 기업인들을 보면 대부분 오너가(家) 경영인이다. 횡령 혐의 등을 받은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된 삼성그룹 경영진들, 부도 위험을 숨기고 투자자에게 피해를 준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 등은 모두 오너 경영의 폐해 사례들이다.
<한국재벌사> 저자 이한구 한국재벌연구소장은 CNB뉴스에 “수백년 된 주식회사의 역사를 가진 선진국들과 달리 기업역사가 100년도 되지 않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창업주 일가가 ‘회사가 내 것’이라는 낡은 사고를 갖고 있다”며 ”오너가의 온갖 전횡으로 얼룩진 한국 재계에서 HS효성그룹이 새로운 지배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국내 경제계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CNB뉴스=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