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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르포] 핫한 ‘향동지구’에 이완용이? 개발에 덮인 역사 속 비밀

아파트 숲 뒤엔…곳곳에 비극 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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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20.06.17 09:33:17

경기도 고양 향동지구 내 이완용 일가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삘간 테두리 안).  이완용 집안인 우봉 이씨의 선산과 아들 묘를 비롯한 문중 묘역이 있고, 원수골(옛 지명) 일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CNB 취재결과 확인됐다.     

수색 역세권 통합개발, 창릉신도시 건설 등 매머드급 개발호재로 주목받고 있는 ‘경기도 고양 향동지구’가 실은 아픈 과거를 간직한 거대한 유적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현재 9000여 세대 규모의 아파트·빌라·오피스텔 등이 들어섰거나 건립 중인 이곳은 일본에 나라를 넘긴 을사오적 이완용의 자취를 비롯해 곳곳에 역사의 굴곡이 서려있다. CNB가 지난 13~14일 이틀에 걸쳐 향동지구의 유적들을 단독 취재했다. (CNB=도기천 기자)

건설사들 잔칫집 된 ‘향동지구’
아파트 숲 곳곳에 한(恨) 맺혀
이완용·애기능·윤임…비극 일색


‘향동지구’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일대 121만3255㎡ 부지에 조성되고 있는 대규모 택지개발지역이다.

2019년 3월 계룡건설의 DMC리슈빌더포레스트를 시작으로, 호반건설의 DMC호반베르디움더포레과 효성건설의 DMC해링턴플레이스, 중흥건설의 중흥s클래스 등 5천여 세대가 이곳에 집들이를 마쳤다. 앞으로도 빌라 단지와 오피스텔, LH공사의 공공분양·임대 단지 등 3~4천여 세대가 더 입주할 예정이다.

 

이곳은 주변에 개발 붐이 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향동지구와 직선거리 1킬로 남짓한 거리에 서울시가 20여년 전부터 국내 IT·미디어산업의 메카로 조성해온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가 자리잡고 있다. DMC에는 MBC 사옥을 비롯해, YTN, KBS미디어센터, 중앙·조선·동아일보의 종합편성채널 방송국 등이 들어서 있으며, CJ E&M, LG CNS, LG유플러스, 한샘 등 대기업 수십여 곳이 둥지를 틀었다. 강북 최대규모인 롯데쇼핑의 ‘상암 롯데몰’ 건립도 예정돼 있다.

 

지난 14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향동지구 초입의 풍경. 초고층 아파트단지 사이사이에 역사의 비극이 서려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향동과 다리(수색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서울 은평구 수색동은 수색·증산뉴타운 건립이 한창이다. 롯데건설(수색4구역), SK건설(수색9구역), GS건설(수색6·7구역, 증산2구역), 현대산업개발(수색13구역) 등 내로라하는 대형건설사들이 1만여 세대의 아파트를 공급하고 있다.

수색·증산뉴타운 중심에는 대규모 역세권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와 코레일은 총 1조7000억원을 투자해 2025년까지 지하철 6호선·경의중앙선·공항철도 등 3개 노선이 지나는 수색역·DMC역 일대 32만㎡를 개발할 예정이다.

향동지구는 작년에 3기신도시 예정지로 지정된 고양 창릉지구와도 지척이다. 창릉지구에는 3만8천여 세대의 신도시가 들어서는데, 향동지구 및 서울 은평구와 지하철로 연결된다.

이처럼 호재가 넘치다보니 아파트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2017년 DMC호반베르디움더포레의 34평형 분양가가 4억 초반 대였는데 현재 7억원을 호가하고 있다.

 

이완용의 선조인 조선 중기 문신 이지신(1512~1581)의 신도비(왼쪽)와 고양시 향토문화재 지정비. 이 비석들은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270-4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일대가 우봉 이씨(牛峰 李氏) 선산이다. (사진=도기천 기자)

 

영욕의 세월…이완용 일가 흔적들

이처럼 핫한 지역이지만 과거사는 비극으로 얼룩져 있다.

향동은 산이 마을을 둘러싼 형태라 산골 또는 향골로 불리었다고 한다. 산골은 산 아래에 있는 골짜기란 뜻이며, 향골은 봄이면 산골짜기에 꽃이 만발해 온통 향기로 가득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골짜기 곳곳에 공원과 등산로가 조성되면서 산속에 숨겨진 아픈 역사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이완용의 흔적이다. 이완용은 을사오적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넘긴 매국노로 알려져 있다. 고종을 협박해 일본과의 을사늑약(1905년)을 주도했고 총리대신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1910년)을 체결했다.

향동에는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의 묘와 이완용 일가의 선산(先山) 및 문중(門中) 묘역이 있다. 이승구는 당대의 절세 미인이었던 아내 임걸귀와 아버지 이완용의 불륜사실을 알고 자살한 불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을사늑약 후 이승구가 일본 유학 중 귀국했는데, 내실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자신의 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어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했으니 내가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탄식한 뒤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완용은 승구를 호적에서 제외했다고 알려져 있다.

 

2006년 8월 발견된 이완용의 장남 승구 부부의 묘. 발견 당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는데 해방 직후 마을 주민들이 묘에 불을 지르고 무덤을 파헤쳤다고 한다. (사진=연합뉴스)

승구와 임걸귀는 향동 야산에 묻혔다. 이곳은 과거 ‘원수골’로 불렸던 곳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원수의 자식이 묻힌 곳이라는 의미에서 원수골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설은 임진란 때 왜군을 물리쳐 그런 지명을 얻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지금도 지도에서 ‘향동 원수골’을 검색하면 대략적인 위치가 나온다.

승구 부부의 묘는 2006년 8월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됐다. 당시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이던 정동일씨가 발견했다. 발견 당시 묘는 봉분이 사라져 아카시아 나무가 자라고 가로 120cm, 세로 90cm 크기의 상석만 남아있었으며 상석도 파손돼 묘 주인을 알리는 글씨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고양시 문화유산관광과 주무관인 정씨는 CNB에 “향동 지역 원주민 어르신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완용 일가는 일제강점기 때 향동과 인접한 화전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일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며 주민들을 괴롭혔다고 한다”며 “해방 직후 성난 마을 주민들이 이승구 부부 묘에 불을 지르고 무덤을 파헤쳤다”고 밝혔다. 이완용에 대한 적개심이 애꿎은 아들 부부에게 전이된 셈이다. 실제 이승구는 친일 행적이 알려진 바 없다.

 

지금의 향동 호반베르디움더포레 2단지 뒷산에 있는 우봉 이씨(牛峰 李氏) 감찰공파(監察公派) 문중 묘역. 우봉 이씨 집안은 수백년 전부터 향동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았고 이완용 대(代)에 와서 크게 번창했다고 전해진다. (사진=도기천 기자)    
 

자살과 파묘…恨 서린 ‘원수골’

승구가 향동에 묻힌 이유는 우봉 이씨(牛峰 李氏) 선산이 원수골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향동 호반베르디움더포레 2단지 뒷산 일대다.

이곳에는 승구 부부 묘 외에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중종 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호조참의, 예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이지신(1512~1581)의 묘와 그를 기리는 신도비(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 우봉 이씨 감찰공파(監察公派) 문중묘(8구)가 자리잡고 있다.

현종3년(1662)에 건립된 신도비는 장방형의 비좌와 팔각 지붕형의 옥개를 갖추었고 비신의 규모는 높이가 203cm, 폭 94cm다. 1986년 6월 16일 고양시의 향토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됐다. 위치는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270-4번지다.

이완용 일가는 일제강점기 때 권력을 앞세워 선산 인근의 토지·임야를 사들이기도 했다. 땅의 규모는 이완용이 직접 소유했던 2필지를 비롯, 7개 필지 2만5천평에 이른다고 한다.

 

이완용의 선조인 조선 중기 문신 이지신(1512~1581)의 신도비(빨간색 테두리) 양옆으로 길게 뻗은 산자락이 원수골로 불렸던 곳이며, 이완용 일가는 한때 이곳 2만5천평의 토지·임야를 소유했다. (사진=도기천 기자) 

훗날 이 땅은 여러 곡절을 겪었다. 이완용은 장남 승구가 손 없이 사망하자 차남인 이항구의 아들 병길을 승구의 아들로 입적시켜 자신의 장손으로 만들었다. 병길은 후작 작위를 받고 이완용의 전 재산을 물려받았다. 해방 후 병길은 반민특위에 체포돼 재산의 절반을 헌납하고 풀려난다.

그런데 병길의 장남 이윤형이 1992년 조상 땅 찾기 소송을 통해 이완용의 땅 상당부분을 되찾는다. 당시 소송 기록에 따르면 돌려받은 부지의 주소가 향동 산 118-1번지인데, 우봉 이씨 선산이 위치한 산 118-2번지와 맞붙어 있다.

이후 이 땅은 공익적 목적에 사용하자는 우봉 이씨 문중의 의사에 따라 1990년대 후반 서울대에 기증됐다. 이후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 대학을 상대로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소를 취하해 현재는 대학 소유로 남아 있다.

하지만 정작 이완용은 이곳과 거리가 먼 전북 익산에 묻혔다. 정 주무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완용은 향동 선산에 자신의 묘터를 마련했지만 도굴, 파손 등을 염려해 먼 지방을 택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했지만 온전치 못했다. 훗날 이완용의 증손자는 친일 매국한 조상이 부끄럽다며 이완용 묘를 파묘해 화장했다.

CNB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우봉 이씨 선산과 이승구 부부 묘, 이지신 신도비와 문중 묘, 이완용 집안이 소유한 토지는 전부 같은 장소(향동 원수골 일대)에 위치해 있다. 우봉 이씨 집안은 수백년 전부터 향동 일대에 터를 잡고 살았고 이완용 대(代)에 와서 토지를 확장하는 등 크게 번창한 것이다.

 

향동에 존재했던 애기능은 현재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구글 지도로 추정한 애기능(빨간색 테두리) 위치. (사진=도기천 기자) 

 

콘크리트로 변한 ‘애기능’

향동에는 이완용 일가의 영욕(榮辱) 뿐 아니라 ‘애기능’에 얽힌 가슴아픈 사연도 전해온다.

조선시대 규범에 따르면, 원래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이른다. 그런데 애기능은 내시(內侍)가 되기 위해 거세를 하는 과정에서 숨진 아이들의 묘라고 알려져 있다. 민가에서 아이들의 원혼을 달래고자 묘비조차 없는 무덤을 능(陵)으로 높여 불렀다는 게 애기능의 유래다.

당시 의학 수준이 미비했던 점을 감안하면 수많은 어린 목숨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죽으면 북한산과 은평구 진관동 일대에 묻혔는데, 향동에는 죽은 아이들이 왔다.

향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애기능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지도에서도 사라졌다. 유일하게 구글 지도에는 향동 애기능1로, 2로, 애기능안길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위치는 지금의 DMC해링턴플레이스와 중흥s클래스 단지 맞은편 산자락이다.

 

구글 지도에는 향동 애기능1로, 2로, 애기능안길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사진=도기천 기자)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 중 하나인 을사사화 때 희생 된 윤임(1487~1545)의 묘도 향동 야산에 있다. 이완용 일가가 소유했던 원수골 토지와 인접한 곳이다.

윤임은 중종 때부터 명종 초기까지 대윤(大尹)으로 불린 권력자다. 중종비 장경왕후의 오빠로서 권세를 누렸지만 소윤(小尹)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숙청돼 아들 3형제와 함께 사사(賜死)됐으며, 훗날 선조 때 신원됐다. 윤임의 묘는 향동동 239-7번지 인근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CNB 취재진이 이 주소로 찾아갔지만 사유지라서 접근할 수 없었다.

이처럼 향동개발지구에는 곳곳에 역사의 굴곡이 서려있다. 빼곡히 늘어선 고층아파트들이 마치 그날의 비극을 숨겨주듯 숲을 이루고 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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