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계를 중심으로 생체인증 결제가 확대되면서 영세 밴사들이 생존 위기에 처했다. 롯데카드의 손바닥 정맥 결제 서비스 ‘핸드페이’ 시연 모습. (사진=롯데카드)
삼성페이, 핸드페이에 이어 핑페이가 도입되면서 플라스틱 카드 시대가 역사 속으로 저물고 있다. 여신금융업계 전반에 불어 닥친 변화는 소비자의 편의성을 높여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는 중소 밴(VAN) 업계의 설 자리를 뺏고 있다. CNB가 기술력의 진화 앞에 생존 위기에 처한 ‘을’들의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가맹점수수료 인하로 타격 입은 카드사
생체인증 결제로 종이전표 수수료 줄여
전표수거로 먹고살던 밴업계 고사 위기
시장 원리에 맡기되 ‘상생의 길’ 찾아야
밴사는 카드사를 대신해 결제 승인을 중개하고 가맹점을 관리하는 회사다. 통상 가맹점에서 카드를 결제하면 카드사는 해당 매장에 대금을 지급하고 수수료를 받는다. 이 과정에 밴사가 끼어 있다.
밴사는 고객이 결제를 취소하거나 서명 위조 등 사고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고객이 서명한 영수증을 수집, 이를 카드사에 제출해 전표 수거료를 받는다. 또 결제 통신망과 단말기를 보급하고 관리한다. 가맹점을 모집해서 카드사와 연결시켜 주는 일도 밴사의 주요업무다. 한마디로 매장과 카드사를 연결해주는 일종의 ‘중간유통상’인 셈이다.
이들이 생존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표면적으로는 결제수단이 변하면서 종이전표가 사라지게 된 영향이 크지만, 속사정은 좀 더 복잡해 보인다.
▲밴(VAN)사와 카드사 간의 결제유통 흐름도. (그래픽=연합뉴스)
우선 본격적인 위기는 삼성페이가 보급되면서 시작됐다.
2015년 선보인 삼성페이는 삼성스마트폰에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한꺼번에 탑재할 수 있는 모바일 결제 시스템이다. 애플페이와 구글의 안드로이드페이 등에 비해 범용성이 뛰어나 신한카드, KB국민카드, 삼성카드, 현대카드, 롯데카드, NH농협카드, BC카드, 우리카드, 하나카드 등 대부분 카드사들이 제휴를 맺고 있다. 지문이나 홍채 인증 방식이라 스마트폰을 분실하거나 도난당해도 타인이 사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는 종이전표 관리, 보안사고 중재 등을 담당하던 밴사의 역할을 크게 축소시켰다.
현대카드는 삼성페이 결제분에 대해 매출전표 수수료 지급을 거부했고, 다른 카드사들도 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보안성이 확실한 삼성페이의 특성상 전표 확인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작년 5월에는 롯데카드가 손바닥 정맥으로 결제하는 ‘핸드페이(Hand Pay)’ 서비스를 선보였다. 핸드페이는 손바닥 정맥 정보를 사전에 등록하고 결제 시 전용단말기에 손바닥을 올려놓기만 하면 카드결제가 되는 바이오인증 시스템이다. 현재 롯데마트를 비롯한 롯데 계열사 매장에서 이용되고 있다.
손가락을 단말기에 대면 대금을 결제할 수 있는 가칭 ‘핑페이(FingPay)’도 등장했다. 이는 손가락 정맥 패턴이 사람마다 달라 위·변조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활용한 기술이다. 현재 일본 내 생체 인증이 가능한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중 80% 이상에 이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신한카드, 비씨카드, 하나카드는 이 서비스를 오는 10월경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우선 유명 편의점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도입하고 앞으로 다른 가맹점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카드사들은 불필요한 결제 과정을 줄이기 위해 생체인증 시스템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LG히다찌 본사에서 열린 ‘핑페이’(가칭) 사업 제휴식. (왼쪽부터) 박정우 나이스정보통신 법인사업본부장, 김정수 신한카드 디지털사업본부장, 이석희 LG히다찌 솔루션&서비스사업본부장, 최정윤 비씨카드 디지털혁신본부장, 정성민 하나카드 미래사업본부장. (사진=신한카드)
카드업계 “결제시장 정상화 과정”
이같은 첨단결제수단의 등장은 표면적으로는 소비자의 편의성을 높이겠다는 카드사들의 고객서비스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면에는 대형가맹점과의 직거래를 확대해 밴 수수료를 줄이겠다는 속내가 담겨있다.
카드업계와 밴 업계 등에 따르면 신한·삼성·KB국민·우리카드 등은 지난해부터 이마트와 롯데마트·신세계백화점·현대홈쇼핑 등 대형가맹점과 결제 직승인을 하고 있으며, GS칼텍스 등 정유회사들로 확산되고 있다.
직승인의 전제 조건은 보안성과 안정적인 결제 시스템이다. 핑페이 등을 통해 이 점이 충족되면 직승인은 더 확산될 전망이다. 거래조회와 승인, 매출전표 매입 등을 해오던 밴사들은 그만큼 설 자리가 좁혀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2016년 금융당국의 ‘5만원 이하 무서명거래 정책’ 도입으로 인해 전표 수수료가 크게 줄어든 상황이라 밴 업계 입장에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되고 있다.
생존 위기에 몰린 밴 업계는 카드사들이 대책을 마련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밴 대리점 협회격인 한국신용카드조회기협회의 조영석 사무국장은 CNB에 “그동안 밴 대리점들은 종이전표 관리 수수료가 확보된다는 전제에서 가맹점 모집비용, 단말기 설치·관리, 통신 인프라 구축 등을 부담해왔다”며 “전표수수료가 줄어든 만큼 다른 부분에 대한 비용이 현실화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이전표가 사라지더라도 가맹점 관리를 밴 대리점들이 담당하고 있는 만큼, 카드사들이 손실분을 일정부분 메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카드업계는 비정상적인 결제 유통구조를 바로 잡는 과정이라는 입장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CNB에 “밴 업계와의 갈등이 대기업의 영세업자에 대한 갑질로 비춰지고 있어 곤혹스럽다”며 “단순히 전표수수료를 절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과정을 없애자는 취지”라고 강조했다.
▲롯데하이마트가 지난 4월 선보인 ‘홍채인증 로그인’ 서비스. (사진=연합뉴스)
‘카드수수료 인하’가 부른 나비효과?
이같은 카드사와 밴 업계 간 갈등의 원인을 정부의 가맹점수수료 인하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정부는 최근 몇년 간 수차례 수수료율을 조정해 왔다. 작년 6월에는 중소 가맹점에 대한 우대요율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기존에는 연 매출 2억원 이하 중소 상인에게만 0.8%의 우대요율을 적용했지만 이를 연매출 3억원 이하로 넓혔으며, 연매출 3~5억원 규모 상인들의 요율은 2% 내외에서 1.3%로 줄여줬다. 다음 달부터는 슈퍼, 제과점, 편의점 등 소액 결제가 많은 업종의 수수료가 평균 0.3%포인트 내린다.
한발 더 나가 여권에서는 대기업 가맹점(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주유소 등)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할인요율을 일반 가맹점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올해 말로 예정된 카드 수수료의 원가 재산정 작업이 시행될 경우, 수수료가 또 인하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카드사들의 가맹점 수수료 수입은 5~6년 전에 비해 반토막이 난 상태다.
카드업계 한 관계자는 CNB에 “금융당국이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소상공인들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며 소액결제업종의 카드수수료를 최근 또 인하했다”며 “정부가 ‘골목상권 보호’라는 명분으로 카드업계를 끝없이 옥죄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삼성페이·카카오페이·핑페이 등 기존 플라스틱카드를 대체하는 첨단 결제수단이 속속 등장하면서 전표를 관리·공급하는 밴(VAN)사가 설자리를 잃고 있다. (사진=CNB포토뱅크)
‘카드사→대형 밴사→밴 대리점’ 먹이사슬
이 문제는 고스란히 밴사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지난해 카드사들은 승인 건수를 기준으로 수수료를 책정하던 ‘정액제’를 결제 금액 기준인 ‘정률제’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밴 업계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거래 건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밴사의 지난해 중계수수료 수익은 1조1508억원으로 전년(1조1662억원) 대비 154억원(1.3%) 감소했다.
그나마 대형 밴사들은 타격이 덜하다. 대형 밴사는 밴 대리점에 지급하는 수수료를 줄이는 식으로 손실을 일정부분 보전(補塡)하고 있다. 마치 발주기업이 하청업체에 주는 비용을 줄이면 하청은 재하청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결국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있는 영세 밴 대리점들이 가장 큰 손실을 입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런 상황을 알고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카드사와 밴사 간 수수료율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중재에 나서고 있지만 ‘땜질식 처방’에 불과해 갈등이 멈추지 않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신한카드가 밴업계가 전담해온 전표매입 수수료를 정보통신기술(ICT)업체 케이알시스에 위탁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이려다 여론이 악화되자 철회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양쪽 모두 통 큰 양보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정세현 경영컨설턴트(인하대 겸임교수)는 CNB에 “밴 업계의 밥그릇(생존권)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며 “기술발달에 따른 불필요한 부분(종이전표 수수료 등)에 대해서는 밴 업계가 과감하게 양보하고, 대신 카드사들은 단말기 관리와 가맹점 영업 등을 밴 대리점에게 일임하고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현실화 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장원리를 바탕으로 하되,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