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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천경자 미인도, 김재규 집에서 나왔다면 오히려 가짜일 가능성 크다

두 여인 ‘우정의 징표’가 역사 격변 휘말려 ‘미인도’로 둔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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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도기천기자 |  2017.01.03 09:15:40

▲CNB가 단독입수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미인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불기소이유통지서’. 이 문서 중 ‘미인도 이동 경로’(소장 이력)의 상당 부분에서 여러 의문점이 발견됐다.

미인도를 둘러싼 고 천경자 화백의 유족과 검찰 간의 진실 공방이 갈수록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검찰이 진품의 주요근거로 든 ‘미인도 이동 경로’(소장 이력)의 상당 부분이 근거가 부족하거나 논리적 허점이 있는 것으로 CNB 단독취재 결과 확인됐다. 검찰과 유족 측 주장을 거꾸로 재구성 해보니 미인도가 천 화백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는 상관없이 탄생했을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CNB=도기천 기자)

김재규 부인, 오씨의 처와 숙대 동문 ‘절친’
둘 사이 작은 선물 ‘천경자 미인도’로 둔갑
‘천경자→중정 직원→김재규’ 이동 경로 의문

CNB가 단독입수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미인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불기소이유통지서’(2016.12.26.)에는 그간의 검찰 수사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앞서 천 화백의 유족 측은 지난해 4월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인도가 천 화백의 작품이 아님에도 진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및 행사 혐의로 고소·고발했다. 

검찰은 6개월 간의 조사 끝에 지난달 이들을 전부 불기소처분(혐의없음)했다. 총 60페이지 분량이 달하는 불기소이유서에는 미인도의 소장 이력과 감정결과 등이 자세히 서술돼 있다. 

검찰에 따르면, 천 화백은 1976년 12월 대구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지인을 통해 당시 중앙정보부 대구분실장인 오종해 대령을 소개받았다. 이듬해 오씨가 천 화백에게 그림을 구매하고 싶다고 부탁하자 천 화백은 미인도를 포함한 그림 2점을 건넸다. 이중 큰 그림은 천 화백이 돌려받았고 작은 그림은 회수하지 않았다. 오씨의 처는 김재규의 부인 김모씨에게 이 작은 그림을 선물했다. 이 그림이 미인도였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이후 김재규는 1979년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뒤 계엄사령부(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에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고 미인도는 계엄사에 헌납(훗날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됐다. 검찰은 국가기록원과 육군본부 등에서 당시 김재규의 ‘증여재산목록’ 공문을 찾아 이를 확인했으며, 특히 김재규의 처와 딸의 진술을 통해 보문동 집(김재규 자택) 응접실 벽에 미인도가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천경자→오종해→오종해의 처→김재규의 처’ 순으로 미인도가 전달돼 최종적으로 김재규의 집에서 발견됐다는 것. 이처럼 소장 이력이 확실하므로 진품이라는 게 검찰의 논리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1979년 10.26사건 직후 재판 모습. (당시 영상 캡처)


의혹만 더 키운 檢 수사 

얼핏 보면 완벽해 보이는 이 논리에는 몇 가지 허점이 숨어있다. 

우선 검찰은 작품 자체의 진위 보다 ‘김재규의 집에서 나왔다면 진품’이라는 가설을 먼저 세웠다. 여기에는 “당시 대통령 다음 권력자였던 중앙정보부장의 집에 누가 감히 가짜를 선물할 수 있었겠나”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CNB 취재결과 미인도는 뇌물·청탁의 성격이 아니라 오랜 친구 간 ‘우정의 산물’로 전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김재규 유족 측에 따르면, 오씨의 처와 김재규의 처 김씨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둘은 여대생이 드문 시절인 1948년에 나란히 숙명여대에 입학한 동기동창이었으며, 오씨의 처가 김재규 남동생의 중매를 섰을 정도로 가까웠다. 

70년대 후반의 어느날 오씨의 처는 절친인 김씨에게 그림 한 점을 선물했다. 김씨는 그 그림을 거실 쇼파 위에 걸었다. 김재규 유족 측은 “그 분(김재규)은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그 그림이 천경자 화백의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어느날 아내를 통해 그림이 집에 들어왔으며, 김재규는 이에 대해 아무 관심을 두지 않았단 얘기다. 

오씨와 오씨의 아내, 천 화백과 김재규 모두 세상을 등진 상황이라 정확한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김씨(80대 후반으로 추정)가 최근 김재규의 동생 A씨를 통해 이같은 입장을 전했다. 

A씨는 “검찰이 그림(미인도) 사진을 보여주며 집(보문동 김재규 자택)에서 본 적이 있냐고 해서 사진을 형수(김재규의 처)에게 보여 줬더니 ‘예전에 친구(오씨의 처)로부터 선물 받은 것과 비슷하다. 그게 진품인지 가짜인지는 모른다’고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이는 친한 친구 사이에 오간 것이라 굳이 진품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검찰의 불기소이유서에는 이런 얘기들이 대부분 빠져있다.

오씨는 생전에 언론인터뷰에서 “천 화백에게서 그림 한 점을 받은 일은 있지만 천 화백이 돈을 받지 않아 다시 그림을 돌려줬다. 그 그림은 2호 정도 크기로 4호 크기인 미인도와는 다른 그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천 화백 또한 생전에 “오씨에게 그림 한 점을 준 적이 있는데, 현대미술관이 갖고 있는 미인도가 아니다. 크기가 작고 전혀 다른 그림”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뤼미에르 광학연구소는 “미인도가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 아니다”고 발표했지만, 검찰은 미인도의 소장 이력(김재규 소장)이 분명하다는 점 등을 들어 미인도가 천 화백의 작품이 맞다고 결론 내렸다. 뤼미에르 광학연구소의 분석보고서 한글판.


라면 한 박스도 받지 않던 김재규가 미인도는 “왜”

김재규의 성품을 들여다보면 의문은 더 커진다. 그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은 “뇌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재규의 보문동 자택에서 집사(執事) 역할을 해온 최종대씨는 2013년 발간된 <김재규 평전(시사인북)>에서 “(10.26 직후에) 헌병들이 와서 집 안을 발칵 뒤집을 적에 값비싼 물건이나 보석 같은 게 하나도 없어서 헌병대장이 ‘여기가 중앙정보부장 집 맞나’ 했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오씨 또한 생전에 언론을 통해 “부장님(김재규)은 누구와도 독대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10.26직후 그의 구명운동에 나섰던 함세웅 신부와 강신옥 변호사도 “충직하고 검소한 군인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재규와 같은 충의공파 종친인 김형종 삼양라면 상무이사가 1979년 김재규에게 라면 한 박스를 선물했다가 되돌려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김재규의 부인 또한 검소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각종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헌옷을 기워 입을 정도로 검소했고 장판에 니스칠을 직접 했다.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뒷장까지 쓴 뒤 잘 넣어 뒀다 포장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검찰은 불기소이유서에서 “인사에서 밀려난 오씨가 재기하기 위해 자신의 처를 통해 김재규 측에 미인도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오씨 딸로부터 받았다”고 밝혔지만, 김재규 부부의 이같은 성품으로 볼 때 그 그림이 천 화백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여재산목록’에 뚜렷이 기재돼 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미인도가 김재규의 집에서 발견됐지만 진품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김재규 증여재산목록’ 왜 검증 안하나 

검찰이 국가기록원에서 37년 만에 찾아냈다는 당시 김재규의 ‘증여재산목록’ 또한 조작됐을 가능성을 의심받고 있다. 

지난달 CNB 단독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이 문건에는 미인도를 포함해 무려 209개의 물품이 등장한다. 다이아 반지와 롤렉스 시계 등 귀금속류가 97점, 고려청자 등 자기류가 7점, 동양화·붓글씨 등 고서화가 33점, 화장대·교자상 등 가구류가 19점, 8~10폭 규모의 병풍이 16개, 조각·박제 등이 10여점에 이른다. 검찰은 목록 중에 미인도가 있다는 점을 들어 천 화백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김재규의 보문동 집이 수백점의 고가품을 수용할 정도로 넓지 않다는 점 ▲10.26사건 재판에서 검찰 공소장에 김재규의 비위사실(고가품 부정축재)이 없다는 점 ▲목록에 명기된 고가품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 ▲당시 김재규가 신군부로부터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종합하면 신군부가 쿠데타의 정당을 확보하기 위해 김재규를 파렴치범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문건일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관련기사: [단독] 37년 만에 드러난 김재규의 ‘천경자 미인도 리스트’…그가 아꼈던 피아노는 없었다)

특히 검찰은 해당 물품목록을 김재규의 유족들에게 확인하지 않은 채 미인도 수사를 종결해 의혹을 더하고 있다. 유족 측은 “검찰로부터 증여재산목록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앞뒤 퍼즐을 맞춰보면 ‘천경자→오종해→오종해의 처→김재규의 처→김재규’ 순으로 미인도가 이동됐다는 검찰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힘든 상황이다. 

이렇다보니 천 화백의 유족들은 검찰이 미인도의 이동경로를 미리 짜맞춰놓고 수사를 진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검찰이 지난달 19일 공개한 ‘미인도’ 원본. 소장 경로 및 진품 여부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미인도는 김재규에 대한 편견이 탄생시켜”

이처럼 검찰의 수사에 오류가 있다면 미인도의 진짜 진실은 뭘까.

검찰 조사 결과와 김재규·천경자 유족 측 주장, 오씨와 천 화백의 생전 주장 등을 바탕으로 흩어진 퍼즐을 조합해보면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이 성립될 수 있다.   

김재규, 오씨, 천 화백과는 전혀 무관하게 친구(김재규의 처와 오씨의 처) 사이에 별 뜻 없이 한 점의 그림이 오갔을 가능성이다.   

여기에는 천 화백의 가짜 그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한국화랑협회가 지난 2002년 감정위원회 설립 20주년을 맞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82년 이래 감정을 거친 2525점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745점(29.5%)이 위작이었다. 특히 이중에는 천 화백 작품이 위작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미인도를 본인이 위조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은 바 있는 권춘식씨(69)도 이 시절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위작가였다. 

미술계 한 원로는 “70~80년대에는 전문적인 위조단이 조직적으로 가짜그림을 대량 생산해내는 경우가 많았고 주로 상류층에서 선물로 유통됐다”고 말했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뇌물 성격이 아니라 아내가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그림이었기에 당당하게 집에 걸어뒀을 수 있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재규 집에서 1백여점의 고서화가 나왔다고 주장했지만 김재규의 유족들은 응접실 벽에 걸려있는 한 점의 그림만을 기억했다. 만일 여러 그림들 속에 미인도가 섞여 있었다면 기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미인도 위작 시비는 ‘김재규’를 벗어나 작품의 진위 만으로 가려져야 진실에 접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재규에 대한 역사적 편견부터 버리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지금처럼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이미 규정된 상황이라면 미인도는 영원히 그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CNB=도기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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