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이 고(故) 천경자 화백(1924~2015년)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미인도’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 된 가운데, 故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역사 재평가를 주장해 온 재야 원로 함세웅 신부(민주주의국민행동 상임대표)가 지난 16일 CNB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김재규 집에서 고서화 1백여점(미인도 포함)이 나왔다는 건 신군부의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단독] ‘천경자=미인도’는 5공 신군부가 탄생시켰다> (CNB=도기천 기자)
김재규 보문동 집 ‘작은 주택’
고서화 수백점 둘 곳도 없어
나온 건 자유·평등 붓글씨 뿐
군부가 파렴치범 만들려고 조작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미인도가 1979년 10‧26(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며,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세력)가 수사 과정에서 압수해 재무부로 넘겼고 이후 문화공보부를 거쳐 현대미술관에 보관돼 왔다”고 밝혀왔다.
신군부는 1979년 12월 8일 “김재규 집에서 호화자개장, 고려청자 등 고가 자기류, 고서화 1백여점이 발견됐는데 진열이 곤란하자 그대로 창고에 방치해둔 상태였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신군부와 현대미술관의 주장을 종합하면, 당시 김재규의 집에서 발견된 고서화 중에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함 신부는 “10.26사건의 재판기록 어디에도 고서화 등에 관한 기록은 없었으며, 신군부가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김재규를 파렴치범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조작된 얘기”라고 강조했다.
함 신부의 주장처럼 김재규 집에서 미인도가 나온 것이 아니라면 지난 수십년 간 계속돼온 미인도 진위 논란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 된다. 현대미술관이 미인도를 입수하게 된 경위부터 다시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4월 천 화백이 직접 가짜 의혹을 제기하며 불거졌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하 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인도를 복사해 보급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천 화백은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다”고 언론에 알렸다.
이후 25년간 진실공방이 계속돼 왔고, 미술계 전체가 미인도 위작 논란에 휩싸였으며, 천 화백은 마지막까지도 ‘자식을 몰라보는 부모가 있느냐’며 위작임을 주장하다 지난해 8월 생을 마감했다.
이후 천 화백의 유족은 국립현대미술관 측을 사자명예훼손, 저작권법 위반, 허위공문서 작성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했고, 현재 검찰은 현대미술관으로부터 미인도를 제출받아 감정에 나선 상태다. 함 신부의 이번 발언은 검찰 수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은 CNB와의 일문일답. (인터뷰는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개소 3주년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행사 후 진행됐다)
- 신군부는 김재규를 부정축재자라고 발표했다. 수백 점의 고가자기류와 그림이 그의 집에서 나왔다고 발표했는데 당시 김재규 재판에서 그런 언급이 있었나.
이돈명·강신옥 등 당시 재야 1세대 인권변호사들이 김재규를 살려야한다고 해서 함께 구명운동에 참여했다. 변호인들을 통해 김재규 재판과정을 다 봤지만 그의 집에서 고가 자기류와 고서화를 압수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당시 신군부는 김재규의 죄목을 최대한 부풀리고 있었다. 김재규를 희대의 파렴치범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쿠데타(12.12반란, 5.17계엄확대 등)가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없던 것도 만들어서 (김재규의) 죄를 불리고 있던 상황에서, 고가물품들이 김재규 집에서 나왔다면 왜 검찰의 공소장에 그런 내용이 없었겠나.
고서화 등의 얘기는 계엄사 합수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것도 김재규가 재판 받는 날(1979년 12월8일 결심공판)에 터트려서 여론몰이를 했다. 김재규의 법정진술이 알려져 구명운동이 번질까봐 여론조작을 통해 파렴치범으로 만든 것이다.
그림·도자기가 김재규 집에서 나왔다는 건 신군부의 새빨간 거짓말이며, 따라서 현대미술관이 김재규의 집에서 압수한 미인도를 넘겨받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CNB가 당시의 판결문, 공소장, 최후진술, 항소이유서, 변론요지서 등 각종 재판기록을 입수해 분석했으나, 부정축재 및 비리와 관련된 혐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김재규에게 적용된 범죄혐의는 내란목적살인죄 및 내란미수죄였다)
- 당시 고서화 등과 관련된 다른 얘기는 없었나
김재규의 성북구 보문동 집에 가봤는데 그냥 평범한 한옥 주택이다. 고서화 1백여점과 자기류 등이 진열될 공간이 없으며, 보관할 창고도 없는 집이다. 김재규 집에서 압수했다는 물품들의 목록도 없고 압수한 뒤 어디로 갔다는 기록도 없다.
고서화가 아니라 김재규가 직접 쓴 ‘민주주의 인권 자유 평등’ 등의 붓글씨들이 집에서 나왔다는 얘기는 재판에서 증언되었다.
- 김재규는 어떤 사람이었나
김재규는 제3군단장을 지낸 충직한 군인이었다. 그 시절 재야 대통령으로 불리던 광복군 대위 출신의 장준하를 만나 ‘군인들이 나서야 한다’며 의기투합했다. 총칼로 무장한 군사정부와의 싸움에서 더 이상 학생들이 희생돼서는 안되며, 군인이 의거를 일으키는 게 희생을 최소화 할 수 있다는 게 두 사람 생각이었다. 둘은 꾸준히 교류를 가졌으며 유신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혁명을 준비했다. 거사를 며칠 앞두고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실행되지 못했다.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 사상계 대표는 2012년 출간된 <의사 김재규>에서 “평소 선친은 김재규를 민주화 일을 같이할 군인으로 평가했으며, 두 사람은 비밀리에 재야 종교 정치계 학원 군부 등이 총궐기 하는 거사를 준비해왔다. 1975년 8월15일을 군부(김재규)까지 함께하는 거사일로 정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당시 재야에서는 거사 계획을 알게 된 박정희가 선친을 제거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함세웅 신부가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김근태기념치유센터 개소 3주년 고문피해자 지원의 날’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함 신부와의 인터뷰는 이 행사가 끝난 뒤 진행됐다. (사진=도기천 기자)
- 당시 김재규 구명운동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40여일이 지나서 ‘12.8 긴급조치 해제’가 발표됐고 우리도 풀려났다. (당시 함 신부는 반유신·반독재 운동을 벌이다 투옥 중이었음)
그때부터 김재규 구명운동을 열심히 했다. 개신교 목사들과 천주교 사제단 등 종교계가 앞장섰다. 1980년 3월에는 ‘김재규는 대규모 학살을 막기 위해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는 취지의 강연도 했다.
5.17계엄확대(신군부가 일으킨 5.17쿠데타)로 다시 구속되었는데 그때 신군부가 김재규 구명운동 한 것을 문제 삼더라. 두어 달 고생하고 나왔다.
- 오랜 세월 김재규의 명예회복과 역사 재평가를 주장해 오셨다. 이유가 뭔가.
김재규의 거사(10.26사건) 소식은 감옥에서 들었다. 동아투위(동아일보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기자들의 가족이 면회 와서 그들로부터 얘기를 전해 듣고 전율을 느꼈다. 30여분 간 기도 했다. 성경의 많은 기적들처럼 이것이 기적이라고 느꼈다.
김재규는 자신을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수많은 민중의 목숨을 살린 이 땅의 예수 같은 존재다. “벗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이 성서의 해석이다.
잠시 세상을 외면했으면 얼마든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자신을 버리고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택한 것이다.
김재규는 법정진술 내내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 이는 박정희 개인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하기 위해 결행했다는 의미였다. 이런 그가 부정축재를 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