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윤기자 | 2022.11.17 10:07:26
부산대학교 사학과 최덕경 명예교수가 900년 전 중국 원대의 월령서에 주석을 달아 번역한 '농상의식촬요 역주(農桑衣食撮要譯註)'(신서원, 2022.11.12.)를 발간했다.
'농상의식촬요'를 완역하고 주석까지 선보인 책은 국내뿐 아니라, 원서의 간행국인 중국에서조차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번 역주서는 다양한 고전을 참고했는데, 특히 조선시대 각종 농서를 함께 살펴 한-중 양국 간의 영향을 들여다본 노작(勞作)이다.
'농상의식촬요(農桑衣食撮要)'는 농업과 양잠(養蠶)이 곧 만백성의 의식(衣食)의 근원이라는 요지를 담은 농서로서, 1314년(延祐 元年)에 원대 노명선(魯明善)이 월령 형식으로 편집해 근세의 여명기에 나타난 재배작물의 실태와 농민의 일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위구르인으로 이름은 철주(鐵柱)이고 명선(明善)은 그의 자(字)이다. 이 책은 노명선이 권농사(勸農使)로 출사(出仕)해 강회(江淮) 지역의 농정을 시찰하면서 농민들과 토론하며 얻은 경험을 토대로 편찬한 것이다.
저술의 동기는 농민에게 의식의 근본인 농상(農桑)을 익히게 하는 것이었다. 부를 창출해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양육해 의식이 풍족해지면 국가와 천하는 안정되고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평소에 일용의 근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 보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책을 구성해 백성의 근본을 굳건하게 하고자 했다.
노명선이 '농상의식촬요'가 간행돼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보급되기를 바란 것은 농민에 대한 관심과 관리로서의 책임의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책의 구성은 상하 2권으로 편성돼 있다. 상권은 정월에서 6월까지, 하권은 7월에서 12월로 돼 있다. 각 권은 월별로 농사일을 다양하게 편성하고 있는데, 상권의 경우 3월(전체 농사일의 18.4%), 2월(14.5%), 정월(12%), 6월(10.1%)의 순으로 농사일이 집중돼 있고, 하권은 12월(7.2%), 9월(6.3%), 8월·10월(5.8%)의 순으로 농사일이 배열돼 있다. 재배와 작업량의 가짓수만으로 헤아리면 전반기(1~6월)의 양이 68.6%로서 후반기의 31.4%보다 2배 이상 많다.
봄·여름에는 각종 곡물, 과수 및 야채 파종과 김매기, 치즈나 버터와 초 등의 가공 식품의 제조와 누에치기에 주목했고, 가을과 겨울에는 수확과 저장, 보수(補修)와 나무 베기, 야채 절임 등의 작업이 많았다. 특히 12월과 1월에는 납육(臘肉), 기름 제조, 수리와 정비작업 등이 집중돼 있다.
'농상의식촬요'는 기존의 월령서들과는 달리 자영 농민의 민생에 필요한 생산 활동을 총결한 가이드북의 성격이 강하다. 이들의 내용은 모두 백성과 일상을 같이하며 실용적인 것을 찾아내어 종합적으로 제시한 농서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사실 당대 이전 '제민요술'과 '사시찬요' 같은 중세기 농서에는 농상(農桑)의 재배와 음식물의 가공 및 조리의 대상이 주로 귀족이나 지주 중심적이었다. '농상의식촬요'는 중세기에 수용된 외부세계의 농작물이 송원시대로 진입하면서 안정적으로 소규모 자영 농가에서 재배되는 데 중요한 지침 역할을 했다.
특히 저자 노명선이 서북지역 출신으로 이 책을 집필하면서 자연 한족 노농(老農)들의 생산 경험과 서북 소수민족의 생산 경험을 총결했으며, 그렇게 정립된 농업기술과 생산방식이 재차 외부로 전파되는 데 가교역할을 했던 것이다.
최덕경 교수는 이 책을 역주(譯註)하면서 이전단계 농서와의 수용과 변화를 살피고, 이를 통해 원대 농촌과 농민 그리고 농업의 일상을 들여다보고자 했으며, 나아가 송원시대에 정착된 이들 기술이 외부로 어떻게 전파되고 수용됐는지를 조선 농서와의 비교를 통해 살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제 조선에서는 원대의 관점에서 재정리한 '농상집요'나 '왕정농서'의 재배기술과 농법을 주로 수용했고, 이러한 현상은 19세기의 농서에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이 책은 이전의 지주 중심의 농업방식을 자영 농민과 생산자 중심의 농업 체계로 전환해 생산자의 입장에서 재배방식과 생산수단을 자세하게 배치하고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로 인해 야기된 중국 내외 시장의 확대와 상인들의 활동은 농업의 재배방식과 농업기술의 향상은 물론 이를 외부로 개방·확산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다양한 교류 속에서 풍토와 농시(農時)에 매몰됐던 농업방식이 점차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적극적인 선종(選種)과 재배방식을 모색하게 된다. 이 책은 이런 변화된 농촌 속에서 농민의 농업노동과 생활상을 구체화시켜 월령 형식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