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한 드로잉을 보내겠는데 그것들은 전부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만든 것이니 일괄 취급 요망….”
1996년 4월 9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은 몇 달간의 재활 치료 끝에 회복에 성공했는데, 퇴원 후 작업한 첫 작품을 그해 9월 유치원 친구 이경희에게 항공우편으로 보내면서 팩스로 이와 같은 메시지를 덧붙였다. 내용물은 55.5×74.5cm 크기의 고급 판화지 73장에 사진 이미지를 붙이고 색깔 펜, 크레용 등 다양한 필기구로 어릴 적 기억들을 낙서해놓은 듯한, 난해한 작품이었다.
이 73장의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엮였다. 작품에 대한 전문가의 해설과 당사자인 이경희의 해석을 붙여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선보이는 것은, 이경희가 이 작품을 받은 지 24년 만,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지 14년 만인 셈이다.작품을 끌러 본 이경희는 불편한 몸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업을 했다는 것에 대해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마냥 슬프기만 했다고 24년 전을 회고한다. 그래서 그 작품을 더 이상 들여다보지 않고 백남준이 보낸 상태 그대로 다시 포장해 장속에 넣어두었다가,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 2010년 포항시립미술관 개관기념전 때였다. 그리고 이 작품을 연구하듯 분석하고 해석해 작품집으로 선보이는 것이 이 책이다.
이경희 엮음 / 1만 9500원 / 태학사 펴냄 / 1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