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사돈어른인 손경식 CJ그룹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해 그 배경을 두고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다. 이 부회장 측은 과거 박근혜 정부의 CJ그룹 탄압을 부각시켜 ‘절대권력 앞에 기업은 약자’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입증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통해 재판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CNB=도기천 기자)
이재용 재판, ‘수동적 뇌물’ 최대쟁점
‘박근혜 탄압’ 증언하러 손 회장 등장
형량 낮출 마지막 ‘히든카드’ 될 수도
2016년말 국정농단 특검법이 시행되면서 시작된 삼성과 검찰 간의 법적공방이 4년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내년 1월 17일 파기환송심 네 번째 공판에서 손경식 CJ 회장이 증인으로 법정에 서게 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부장판사 정준영)가 최근 이재용 부회장 측의 손 회장 증인신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뇌물공여 등의 혐의로 2017년 2월 구속기소 됐던 이 부회장은 지난해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최근 대법원이 2심(36억원)보다 많은 86억원을 뇌물액으로 판단해 고등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내면서 다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이 부회장 측이 손 회장을 증인으로 요청한 것은 뇌물공여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압박에 의한 전형적인 ‘수동적 제공’이었다는 점을 입증하는데 손 회장이 적합하다고 판단해서다. 이 부회장 측은 손 회장의 입을 통해 당시 엄혹한 상황을 밝혀 “박근혜 대통령의 질책을 동반한 강한 요구를 받고 마지못해 지원했다”(3차공판 변론 요지)는 주장을 증명할 계획이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은 최근 공판에서 “국정농단 사태 전반을 살펴보면, 기업들은 박 전 대통령과 최서원(최순실)씨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했다는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며 “기업들이 대통령의 지시를 거절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거절하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고 변론했다.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삼성 또한 수동적, 비자발적 지원을 했다는 점을 양형에 고려해달라는 얘기다.
실제 국정농단 사태 당시 SK와 CJ는 각각 최태원 회장과 이재현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는 점에서 의심받았고, 롯데그룹은 면세점 사업 허가와 관련된 특혜 의혹을 받았다. 포스코, KT, 한진, 부영 등도 최순실씨 측과 관련된 각종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중 일부는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지만 사법당국은 ‘청와대의 강압에 의한 모금 성격’이었다는 기업들의 주장을 상당부분 인정해 대부분 무혐의 처리 하거나 가벼운 처벌로 끝냈다. 지금까지 재판을 받고 있는 총수는 이 부회장 뿐이다.
유독 CJ에게 집요했던 그녀
그렇다면 삼성 측은 ‘박근혜 청와대’로부터 압력을 받은 여러 총수들 중 왜 하필 손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했을까. 여기에는 당시 정권과 CJ 간의 질긴 악연이 배경이 되고 있다. 이야기는 6년 전부터 시작된다.
박 대통령 집권 초기였던 2013년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은 손 회장에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이미경 부회장(이재현 CJ 회장의 누나)은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하라”고 압박했다. 이 부회장은 공정위 조사, 국세청 세무조사 등 CJ에 대한 압력이 계속되자 2014년 9월 미국으로 출국했다. 재계에 따르면 당시 이 부회장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보행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고 한다.
그해 5월 박 전 대통령의 취임 후 첫 미국 방문을 앞두고 경제사절단을 구성할 때 대기업 총수들이 여럿 포함됐지만 CJ는 제외됐으며, 2014년 대한상의 주최 경제계 신년인사회에서는 CJ가 재계 서열 10위권이었음에도 손 회장이 헤드테이블에 앉지도 못했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공정거래위원회 측에 CJ ENM을 검찰에 고발해 줄 것을 요구한 사건도 있었다. CJ가 제작사에 부당한 이자비용을 청구한 사실을 적발한 공정위가 시정명령을 내리는 선에서 끝내자 청와대가 발끈한 것이다. 이처럼 당시 정부의 CJ 탄압은 다방면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손 회장 통해 그날 진실 드러날까
박근혜 정권이 CJ를 끝없이 미워했던 이유는 CJ가 제작하거나 투자한 영화·드라마 중 일부가 박 전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 때 CJ E&M의 개그프로 ‘SNL 코리아’는 수차례 박 전 대통령을 희화화했으며, CJ E&M이 제작·보급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자 2013년 8월 열린 김기춘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는 ‘종북세력이 문화계를 15년 간 장악했다. CJ와 현대백화점 등 재벌들이 거기에 줄을 서고 있으니 정권 초기에 사정을 서둘러야 한다’ 등의 얘기가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이 주재한 2013년 9월 수석비서관 회의 때는 ‘좌편향 문화예술계에 문제가 많다. 특히 CJ가 문제’라는 발언이 나왔다.
이런 사실들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재판에 제출된 당시 청와대 비서관들의 업무수첩 및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지난해 1월 국정농단 재판에서 조원동 전 수석은 “박 대통령이 ‘CJ가 걱정된다. 손경식 회장이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서 사퇴하고 이미경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이와 관련 손 회장은 “스스로 사퇴하지 않으면 CJ에 더 큰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돼 대한상의 회장에서 물러났다”고 증언했다.
재계에서는 손 회장이 이같은 사실을 이재용 부회장 재판에서 다시한번 밝힐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재판부가 손 회장에게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따라 당시 알려지지 않은 비화가 공개될 가능성도 있다.
CJ 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CNB에 “손 회장은 원래 말을 돌려서 못하는 분으로 알고 있다. 특유의 직설적인 성격으로 볼때 있었던 사실대로 말씀 하시지 않겠느냐”고 전했다.
범삼성가 과거사 시선 쏠려
한편에서는 손 회장 증인채택을 계기로 삼성-CJ가(家)의 과거사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손 회장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형인 고 이맹희 CJ 명예회장의 부인 손복남 여사의 동생이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외삼촌이며 이재용 부회장에겐 사돈어른이 된다. 이 회장과 이 부회장은 사촌지간이다.
이 회장이 과거 경영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됐을 당시 삼성가 여인들이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올린 일이 있었다.
이 회장은 2013년 7월 구속된 이후 요독증이 심해져 부인 김희재씨의 신장을 이식받는 수술을 받았다. 이식 수술 후에도 거부 반응과 감염 등으로 3년 넘게 서울대병원을 오가며 재판을 받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되는 희귀유전병 ‘샤르코-마리-투스’(CMT)의 증세가 악화돼 걸을 때 특수신발 등 보조기구를 이용해야 했다. 삼성가의 유전병으로도 알려진 ‘샤르코-마리-투스’는 10만명 당 36명에게 발병하는 희귀질환으로 손발의 근육이 점차 약해지는 무서운 병이다.
이에 범(凡)삼성가 여인들 중 가장 웃어른 격인 손복남 여사가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아들(이재현)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자 이 회장의 숙모인 홍라희 전 삼성리움 관장(이건희 회장의 부인)이 이를 받아 들였고, 이에 다른 숙모들과 고모가 함께했다.
2014년 8월 법원에 제출된 탄원서에는 이 회장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 외에도 CJ그룹의 경영공백, 가족 간 화해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를 계기로 당시 유산상속을 두고 송사를 벌이고 있던 이건희 회장과 고 이맹희 명예회장 간의 극적인 해빙 무드가 조성되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CNB에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로부터 음으로양으로 압박을 당한 기업이 한둘이 아니지만 총수가 직접 법정에서 그 사실을 증언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며 “그럼에도 손 회장이 증인으로 나서게 된 것은 범삼성가라는 큰 테두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 재판부가 손 회장 증언을 받아들여 정상참작을 한다면 이 부회장은 최악의 경우를 피할 돌파구가 생기게 된다. 현행법상 50억원 이상 횡령은 법정형이 최소 징역 5년 이상이어서 재판부가 재량으로 형을 낮춰주지 않으면 이 부회장이 다시 수감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손 회장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히든카드’가 된 셈이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