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서울 지하철 6호선 망원역 역내에 아이돌그룹 B1A4의 멤버 바로의 생일 축하 광고가 걸려 있다. (사진 = 윤지원 기자)
역대급으로 길었던 추석 연휴가 끝났다. 누구에게나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기간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흔한 직장인인 기자로서는 참으로 꿀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추석은 참 고마운 명절이다.
추석은 농경 사회인 한반도에서 수확의 계절의 기쁨을 가족 및 이웃과 함께 나누는 명절이다. 추석이 명절로 여겨진 것은 적어도 삼국시대 초부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 도읍 안의 부녀자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가 각기 거느리고 7월 15일부터 8월 한가위 날까지 한 달 동안 두레 삼 삼기를 하였다. 마지막 날에 심사를 해서 진 편이 이긴 편에게 한턱을 내고 ‘회소곡(會蘇曲)을 부르며 놀았다고 한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추석은 음력 1월 1일인 설날과 함께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큰 두 번의 명절이다.
그가 태어난 날이 곧 명절
그런데 당신이 아이돌의 팬이라면, 설날과 추석 외에도 몇 번의 명절이 또 있다. 바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생일이다. 아이돌 생일은 생일을 맞은 당사자에게만 의미 있는 날이 아니다. 팬들은 그를 만날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중요한 날로 공식 데뷔일과 그의 생일을 기념한다. 특히, 그 아이돌의 생일에 대해서는, 그날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준 덕분에 팬들이 지금 그의 노래와 춤과 스타일 같은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된 소중한 날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그렇게 고마운 날이 일 년에 딱 한 번 돌아온다. 팬들에게 특별한 날이 아닐 수 없다. 요즘 팬들은 자기들만의 ‘명절’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기념한다. 바로 광고를 통해서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서울 마포구에 사는 Y씨 부부는 낮에 용산구 이태원동 인근에 볼일이 있어 다녀왔다. 여러 대중교통을 환승하며 해당 구간을 왕복하는 동안 이들은 여덟 건이나 되는 아이돌 생일 광고와 마주쳤다. 9월 말이 생일인 아이돌도 있었고, 10월 초가 생일인 아이돌도 있었다.
▲10월 9일, 서울 마포구의 한 버스정류장에 게재된 아이돌 생일 광고. 엠넷 '프로듀스101 시즌2'에 출연했던 김동한의 생일을 축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 = 윤지원 기자)
각각의 광고가 모두 다른 아이돌에 해당되는 광고는 아니었다. 한 아이돌은 Y씨 부부에게도 익숙한 이름과 얼굴이었다.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고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도 있어서다. TV를 잘 안 보는 Y씨 부부에게는 광고에 실린 얼굴과 이름만으로는 도무지 누군지 모를 아이돌도 있었다. 이 부부는 아이돌 팬과는 거리가 먼 일반 대중이다.
30대 후반의 직장인 P씨는 "아이돌 생일 광고라는 문화가 아직 낯설긴 해도, 최근 매일 출퇴근 길에 보다 보니 그냥 일상의 일부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는 십대 시절 젝스키스의 팬클럽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현재 활동하는 아이돌의 음악은 잘 모르고, 팬임을 내세울만큼 특별하게 좋아하는 대상도 없다고 밝혔다. 아이돌 생일 광고에 대한 호감도를 묻자 "호불호는 딱히 없다"면서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성형외과 광고보다 순수해서 보기 좋다"고 대답했다.
Y씨부부나 P씨 같은 일반인이 알거나 모르거나, 관심을 가지거나 말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팬 문화의 하나로 받아들이거나 상관 없이, 아이돌 생일 광고는 최근 2~3년간 눈에 띄게 늘어났고, 요즘 서울 도심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현상이 됐다.
아이돌 생일 광고가 실리는 매체는 다양하다. Y씨 부부가 이 날 본 광고들은 버스 정류장 스탠드, 지나가는 노선버스 몸통, 지하철 역내 벽면의 와이드 광고판, 지하철 플랫폼의 슬라이딩 도어 광고판 등 주로 대형 인쇄 광고였다. 이 날 Y씨 부부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강남이나 홍대 인근, 광화문 등 번화가에서는 차체를 온통 생일 광고물로 감싼 전세 버스가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이를 ‘버스 래핑 광고’라고 한다.
아이돌 생일 광고는 동영상으로 집행되기도 한다. 이런 광고는 유튜브 같은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전파된다. 고층건물 외벽의 전광판에서 집행되기도 한다. 지난 6월에는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인 쯔위의 생일 광고가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올라가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커피숍이나 식당에서 사용하는 진동기에도 동영상 광고가 나온다. 보이그룹 빅뱅의 멤버 승리의 생일 광고는 전국에 100개가 넘는 커피숍의 진동기에서 동시에 집행되기도 했다.
▲지난 6월, 뉴욕 타임스퀘어 대형 전광판에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의 생일 축하 광고가 방영되었다. (사진 = 바이두)
광고비 수백만 원~1억 원, '통큰 팬심'
광고 집행 비용은 만만치 않다. 가장 흔히 보는 것은 지하철 역내 벽면의 와이드 광고판 인쇄 광고인데, 게재 기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이 얼마나 붐비는지에 따라 역마다 가격이 다르다. 아이돌 생일 광고를 전문적으로 기획하는 한 광고 기획사 관계자에 따르면, 사당역 역내 와이드 컬러 광고를 한 달 동안 게재하는 데 드는 비용은 최소 170만 원이다. 광고비에 출력 및 설치비용과 부가세가 포함되는 금액이다. 가장 인기가 많은 역은 압구정, 신사, 건대입구, 홍대입구, 신촌 역 등이며, 같은 역 내에서도 위치에 따라 금액이 전부 다르다. 만약 지하철 와이드 광고를 한 역에 한두 장씩,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의 여러 역에서 집행하는 경우 그 비용은 천만 원을 훌쩍 넘어간다.
일부 지하철 역의 플랫폼 슬라이딩 도어 상단이나 계단 및 에스컬레이터 벽면에는 디지털 화면이 설치되어 있고, 이곳에 디지털 포스터 광고를 게재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화면 광고나 디지털 포스터의 광고 비용은 인쇄 광고보다 비싸 한 면 당 250만~300만 원이라고 한다.
옥외 전광판의 동영상 광고는 광고 효과도 크고 동영상 제작비도 포함되어 광고비가 더 많이 든다. 쯔위의 생일 광고가 걸렸던 뉴욕 타임스퀘어의 초대형 전광판은 한 달에 약 27억 원(2014년 기준) 정도라고 이 기획사 관계자는 전했다.
이처럼 아이돌 생일 광고는 큰 덩치의 팬클럽에서 조직적으로 기획, 집행되는 큰 행사다. 팬클럽에서는 여러 팬들의 아이디어를 접수받고, 다수의 광고 기획사와 협의를 거쳐 광고 내용과 게재 장소 및 매체, 일정 등을 정한다. 그렇게 책정된 비용은 텀블벅 같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모금하는데, 목표 금액에 모자라거나 크게 웃도는 경우 광고 규모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 때 모금되는 광고비의 액수가 곧 팬클럽의 힘이며, 이는 또한 아이돌 그룹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예컨대 하루 동안 방영되며 1억 이상의 광고비가 집행되었을 쯔위의 뉴욕 타임스퀘어 광고는 중국의 팬들이 주도해서 성사된 것으로 알려져 한국 아이돌의 거대한 글로벌 팬덤을 실감케 했다.
▲지난해 12월, 아이돌그룹 빅뱅의 멤버 승리의 생일 축하 동영상 광고는 전국 100군데 이상의 커피숍 메뉴 픽업 호출용 진동기에서 집행되었다. (사진 = 유튜브 영상 캡처)
모범 팬문화 선도...광고시장 영향력 커
팬들이 이처럼 아이돌 생일에 광고를 게재하는 것은 단지 그 아이돌을 열심히 홍보해주거나, 팬클럽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때문만이 아니다. 팬들은 이 광고를 통해 아이돌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전한다.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인사이자, 앞으로 더 열심히 활동해 달라는 당부와 격려의 마음도 담겨있다.
또한, 광고가 기획되고 집행되기까지의 과정에 십시일반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공식 팬클럽의 정식 멤버라는 소속감, 다른 팬들과의 동료 의식 같은 것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사이기도 하다. 팬들은 집행된 광고가 걸려있는 역에서 인증샷을 찍은 뒤 이를 팬클럽 사이트나 SNS를 통해 공유하는 방식으로 팬 활동을 연장하기도 한다.
일부 팬들이 아이돌에게 과한 선물 공세를 펼치거나 거액의 현금을 전하는 등 위화감을 조성하는 경우가 있는데, 팬클럽이 나서서 진행하는 생일 광고는 이런 개인적 일탈을 지양하고 모범적인 팬문화를 선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행사이기도 하다. 트와이스의 소속사인 JYP의 경우, 소속사 차원에서 손편지 이외의 금품이나 선물을 일체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 팬들은 좀 더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생일 광고라는 방법을 고안한 셈이다. 또한, 텀블벅 등으로 모금한 광고비 중 실제 광고 집행에 사용하고 남는 돈은 생일을 맞이한 아이돌의 이름으로 기부되기도 한다.
서울교통공사(지하철 1~8호선)에 따르면 지난 6월 한 달간 아이돌 팬들의 광고 계약금액은 1억 2250만 원이었다. 이는 그 달 전체 광고 판매금액의 12.2%에 해당한다. 반면 대표적인 지하철 광고로 여겨지던 성형 광고는 2015년 월평균 2854매였으나 올해 상반기에는 890매로 급감했다. 이처럼 아이돌 팬덤은 지하철 광고 시장의 큰손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명절에 조카 방에 붙어 있는 아이돌 사진을 보고 사춘기 한 때의 유치한 열정 정도로 과소평가한 어른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자. 당신은 누군가의 존재를 축하하기 위해 1억 원을 모아 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