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한빛PD의 동생 이한솔씨는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CJ E&M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사진=대책위원회 SNS)
최근 CJ E&M에서 발생한 신입 PD 자살 사건은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특히 그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유에는 과도한 업무뿐만 아니라, 조직내부의 ‘집단 따돌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CNB가 한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사내 왕따’의 심각성을 들여다봤다. (CNB=김유림 기자)
이한빛 사건 계기 사내 왕따 논란
상사에게 밉보여 따돌림 부지기수
속 앓다 목숨 끊는 사례까지 속촐
사내교육·산재처리 등 대책 시급
“기계처럼 굴렸다. 경비 절약을 위해 혹사시키고 신입이기에 마음대로 부렸다.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있으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단체카톡방을 보니 한 젊은이를 비열하게 모멸감을 주고 코너로 몰아갔는지 알 수 있었다” 27살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떠난 고 이한빛 신입PD 유족 측의 얘기다.
“학대나 모욕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 됨. 문제가 있었다면 이한빛PD의 ‘근태불량’에 있음. 조사 자체가 사실과는 다른 왜곡된 결론으로 도출 될 수 있으며, 고인과 함께한 연출부 구성원들에게는 명예훼손의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우려가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아무쪼록 유가족분들이 협조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CJ E&M 측이 유가족에게 전한 공식입장이다.
▲고 이한빛PD의 CJ E&M 인턴십 사원증. (사진=고 이한빛PD SNS)
사건은 2016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한빛씨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CJ E&M PD로 입사했다. 같은해 4월 신입 조연출로서 tvN 드라마 <혼술남녀> 팀에 배치되었으며,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그런데 <혼술남녀>의 마지막 촬영 날인 2016년 10월 21일 실종되었으며, 5일 후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유가족에 따르면 <혼술남녀> 팀은 제작과정 중 내부적인 시스템 문제로 갑작스럽게 촬영팀을 교체했다. 그러나 CJ E&M 측은 계약직(촬영팀)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일방적으로 계약파기를 통보, 계약금을 되돌려 받는 절차를 진행했다. 이 모든 과정을 고 이한빛 PD가 도맡아 했다.
이 PD는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리 해고하면서 괴로워했고, 팀 내 문제를 제기하자 선임PD는 비난을 했다. 이후 연출팀 내에서 알 수 없는 집단 따돌림이 시작됐고, 이 PD가 남긴 녹음파일, 카톡 대화 내용에는 수시로 가해지는 인격모독과 욕, 비난으로 가득했다. “이 바닥에 발 못 붙이게 할 것”이라는 등의 위협을 일삼고, 버스 이동 시 짐을 혼자만 옮기게 하는 등 노골적인 갈굼을 자행했다. 수개월 동안 드라마 현장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동료가 사라진 순간에도 ‘X새끼’ 등 비아냥의 카톡 대화만 오갔다.
여기에다 이 PD는 특정 업무를 담당하던 팀이 해체될 경우 모두 일임을 받았고, 의상과 소품, 식사 등의 잡다한 촬영준비부터 데이터 딜리버리, 영수증 정산, 편집 등 분담할 수 있는 일조차 홀로 맡는 불합리한 구조 속에 방치됐다. 심지어 계속된 밤샘 촬영에 쉬는 날은 자료정리까지 일임하게 되어 잠도 못 자고 출근해야 했다. 오죽하면 그의 부모님은 실종 당시 야근하느라 집에 못 온 줄 알고 있었을 정도다.
▲고 이한빛PD 의 유가족은 CJ E&M의 강도 높았던 노동 환경과 직장 상사의 폭언과 따돌림이 자살의 원인이라고 전했다. (사진=대책위원회 SNS)
특히 CJ E&M 측은 이 PD의 생사가 확인되기 직전 그의 부모님을 찾아와 “근무가 얼마나 불성실한 직원이었는지 아시냐”며 무려 한 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이 PD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회사직원에게 사과했고, 몇 시간 뒤 싸늘한 주검의 자식을 마주하는 끔찍한 일을 감당해야 했다.
당시 이 PD의 남동생은 CJ E&M 책임자들과의 만남에서 자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 가해사실 인정 및 재발방지를 포함하는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문제가 있었다면 이한빛 PD의 ‘근태불량’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18일 ‘故 이한빛PD 대책위’의 공식 기자회견으로 인해 6개월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대책위는 CJ E&M 측에 “이한빛PD 사망의 원인과 책임을 인정”, “제 2의 한빛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방지대책’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촉구하고 있다.
CJ E&M 관계자는 24일 CNB에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이한빛님과 유가족분들게 큰 슬픔과 애도를 표한다”며 “당사 및 임직원들은 경찰과 공적인 관련 기관 등이 조사에 나선다면 적극 임할 것이며, 결과를 수용하고 지적된 문제에 대한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등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잇단 안타까운 사건들…대책 마련 시급
‘직장 내 왕따’는 특정인의 업무 성과를 가로채거나 고의적으로 과도한 업무 맡기기, 악성 루머 퍼뜨리기, 필수 정보 공유하지 않기 등 그 사례도 다양하다. 수직적인 힘에 의해 가해지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피해자들은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사표를 내는 것이 다반사이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중소기업중앙회는 협회사 및 상사의 성추행, 사내 왕따로 인해 자살한 계약직 여직원 사건과 관련된 가해자들 모두 복직시킨 상태다. (사진=JTBC)
하지만 결정적인 증인인 피해자가 세상을 떠나면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회사 측은 숨기기에 급급하다. 특히 왕따를 주동하고, 성추행을 방관한 임원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여전히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7월 한국거래소에서 발생한 집단 따돌림과 성희롱에 의한 여직원 자살사건은 가해자 직원이 ‘정직 3개월’의 징계만 받고 종결돼 논란이 되고 있다. 유족들이 수 차례 진정을 넣었고 국정감사에서 문제가 지적됐지만,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은 유족들과 약속한 감사자료 제공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중기중앙회)는 상습적으로 성추행, 사내 왕따를 자행해 비정규직 여직원을 자살로 몰아넣은 직속 상사와 문제의 직원들을 모두 복직시킨 상태다. 2014년 9월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끊은 권씨는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말만 믿고 2년 동안 7번이나 1~2달짜리 쪼개기 계약을 하며 기다렸다. 그러나 일을 진행하며 만난 중소기업 대표에게 스폰서 제안을 받고, 중기중앙회 간부들에게도 성추행 당했다는 사실을 공론화하자 해고됐다.
노조 탈퇴를 하지 않은 직원을 탄압하기 위해 회사 측에서 ‘왕따’를 지시한 사례도 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업체인 EG테크 노조 양우권 분회장은 지난 2015년 5월 “끝까지 싸워 정규직화 소송, 해고자 문제 꼭 승리하십시오”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G테크는 박근혜 전 대통령 남동생인 박지만씨가 회장으로 있는 곳이며, 회사 측은 양 분회장이 숨지기 전까지 별도 사무실 배치, 직원들에게 대화 금지 지시 등 각종 횡포와 인격 모독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 양우권 금속노조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EG테크 분회장이 남긴 일기장의 일부. (사진=금속노조)
또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는 부하 직원을 질투해 고의적으로 업무에서 배제시키고 모욕감을 줘 자살에 이르게 한 경우도 있다.
이모씨는 1989년 카이스트 졸업과 동시에 LG그룹 계열사에 입사해, 2010년 44살의 나이에 LG유플러스의 최연소 상무가 됐다. 그런데 본부장은 이씨를 배제한 채 부하 팀장들에게 직접 업무 지시를 했으며,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까지 갑자기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2012년 8월 이씨는 처남에게 “우리 아이들과 처를 잘 부탁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이른 아침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한 사회학 전문가는 “사내 왕따는 모욕죄, 명예훼손 등 소송이 가능한 심각한 문제임에도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미흡하고,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며 “배울 만큼 배우고 살만큼 살아 본 어른들의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 철없고 어리석다. 정부 차원의 관심과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이한빛 PD 사건을 계기로 대선 이후 제도적 장치가 마련될 지도 관심사다.
문재인 후보는 페이스북을 통해 “고인의 죽음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인 노동착취에 기인하고 있어서 더 안타깝고 죄송하다”면서 “해당 문제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고인의 직장 속 책임 있는 사람들의 분명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CNB=김유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