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상선의 대형 LNG 운송 선박. 현대상선의 LNG사업부문은 자구안 이행 과정에서 지난해 2월 9700억 원에 매각됐다. (사진=현대상선)
건설업을 비롯해 철강·조선·해운 등 기간산업 분야의 불황이 심각한 가운데, 정부의 금융 지원이 조선 산업에만 집중되고 정작 자구노력이 한창인 해운 분야는 외면하고 있다. 3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수출입 무역의 99.7%를 담당하는 한편 유사시 국가의 생명줄을 책임지고 있는 해운업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금융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CNB=정의식 기자)
대우조선해양 수조원대 혈세 투입
한진해운·현대상선은 합병·매각설
“유사시 2개 이상 국적선사 절실”
지난 10월 정부와 금융당국은 3분기까지 4조 5000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고 있는 대우조선해양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4조 2000억 원의 자금을 수혈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바 있다. 당시 정부는 “조선업이 방위산업을 영위하고 있고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는 등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해운업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르다. 지난달 한 매체는 “정부가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 또는 매각 방안을 구조조정 차관회의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직후 금융위원회가 보도 내용을 부정했지만, 정부는 국적해운사를 2개로 유지할 필요성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운업계의 반응은 한 마디로 “참담하다”는 것. 해운업계의 한 관계자는 CNB와 통화에서 “조선업이 방위산업이라면 해운업은 안보산업”이라며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군수품과 전략물자, 병력을 수송하는 배가 외국 국적이라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나”라고 한탄했다.

▲한진해운의 대형 컨테이너 선박. (사진=연합뉴스)
선박은 유사시 제4군(軍) 역할
실제로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적선사는 유사시 육‧해‧공군 다음가는 ‘제4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국적선사들은 선박과 선원을 동원해 군수품 및 전략물자, 병력을 수송한다.
미국의 경우 비상시 국적 선박을 즉시 동원할 수 있는 해운안보 프로그램(Maritime Security Program)을 운영하면서 국적 선사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50여 척의 국가필수선대를 지정하여 운영 중이다. 한진해운 12척, 현대상선 8척이 ‘국가필수국제선박’으로 지정된 상태다.
‘국가필수국제선박’이란 국가비상사태 시 군수품, 양곡, 원유, 액화가스, 석탄, 제철원료 등의 원활한 운송을 위해 필요한 선박을 평시에 지정, 한국인 선원 위주로 승선·운항하는 국제선박을 말한다.
전쟁이 발발해 외국선원들이 모두 내리면 물자수송에 차질이 생기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이들 선박은 외국선원 수를 제한하고, 그 대신 인건비가 비싼 한국인을 추가 고용하며, 이에 대한 차액은 정부가 보상해주고 있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남북이 분단된 사실상 ‘도서(島嶼)국가’인 우리나라에게 해운업은 국가 경제의 핵심 기반이다. 나아가 해운업은 국내 수출입 화물 운송의 99%, 국가 전략물자 수입의 100%를 운송하는 국가 기간산업이다.
국내 수출입 화물은 2014년 8억 9210만톤으로 이중 항공 운송은 0.3%(250만톤)에 불과하다. 반면, 해상 운송은 99.7%(8억 8960만톤)로 국내 수출입 화물의 대다수를 책임지고 있다. 원자력발전 연료봉 및 부품, 원유, 연료탄, LNG, 철광석 등과 같은 전략물자 운송은 100% 해상 운송에 의존하고 있다.
해운산업은 전후방으로 조선-철강-보험-금융 등 다양한 산업과 연관되어 있고 그 파급효과가 크다. 현재 해양․항만산업 40여 개 업종에 52만 명의 고용인력과 매출 144조 원의 규모를 지니고 있다.
특히, 해운업은 반도체, 석유제품, 철강, 자동차, 조선 등과 함께 6대 외화가득산업으로 미래 국가 성장동력이자 국부창출의 원천이다. 2014년 해운업의 외화가득액은 346억 달러로 382억 달러를 기록한 조선업과 견주어 결코 뒤처지지 않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해운산업은 국방 기능을 수행하는 국가안보산업인 동시에 국가경제의 핵심 기간산업이다.
원자력 연료봉, LNG, 원유 등 수송권이 외국 선사에 배정될 경우 국가 비상사태 발생시 국내 에너지 공급이 원천 차단될 수 있다. 국제 해운 선사가 파산하거나 외국 선사에 넘기게 되면 대한민국은 운송과 운임의 결정권을 모두 내주게 된다.
해운업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보다 국가경제 규모가 작은 대만조차 정부 지원하에 3개의 선사를 운영하고 있다”며 “하나로 합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국가 안보를 감안하면, 최소한 2개 이상의 국적 선사를 유지해야, 유사시 긴급 사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이 3일 오후 서울 여의도에서 해운업계 관계자들을 만나 해운업 불황 극복을 위한 선사 간담회를 하고 있다. 한진해운 석태수 사장과 현대상선 이백훈 사장 및 흥아해운 등 한국선주협회 소속 20여개 선사 대표가 한 자리에 모였다. (사진=연합뉴스)
업계 “국가기간산업 해운업, 지원 절실”
지난 14일 국회 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는 ‘위기의 해운조선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국회정책세미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해운업계 관계자들은 획기적이고 적시적인 국적 선사 지원과 육성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김영무 전국해양산업총연합회 사무총장은 “국적선사들이 해외선주, 투자자, 금융기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확고하고 적시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며 “회사채의 신속인수제를 연장해 상환부담을 완화하고 금리 인하, 신규 선박건조 등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정부차원의 정책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해운업계는 무엇보다 경쟁국에 비해 정부 지원이 미흡함에 아쉬움을 표출했다. 우리 정부가 여러 지원책을 실시하고 있으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미약한 실정이라는 것.
실제로 중국‧덴마크‧독일‧프랑스‧일본 등 경쟁국들은 해운산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인식하고 전폭적인 금융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의 경우, 중국은행이 COSCO에 108억 달러의 신용을 제공하고, 중국수출입은행도 2012년 COSCO와 차이나 쉬핑(China Shipping)에 향후 5년간 각각 95억 달러씩 지원했다. 중국수출입은행은 2013년초 5개 민영 중견해운사에 1억 6000만 달러의 유동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유럽의 경우, 독일이 하파그로이드(Hapag-Lloyd)에 18억 달러의 지급보증을 섰으며, 지방정부인 함부르크시도 이 선사에 2013년 7억 5000만 유로의 유동성을 지원했다. 덴마크도 머스크(MAERSK)에 62억 달러의 금융을 차입하고, 수출신용기금을 통해 5억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프랑스도 자국 선사인 CMA-CGM에 채권은행을 통해 5억 달러를 지원하고, 국부펀드를 통해 1억5000만 달러를 지원했으며, 지난 2013년에는 향후 3년간 2억 8000만 유로를 추가 지원키로 결정했다.
반면, 국내 해운업계 1,2위 선사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정부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핵심 자산, 계열사 매각 등으로 6조원이 넘는 자구책을 이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다른 나라들은 자국 해운업을 국가 안보적 차원에서 접근해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인식조차 부족한 실정”이라며, “국가 안보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국적선사들에게 획기적이고 적시적인 지원과 육성 정책을 시급히 마련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CNB=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