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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텔링] 영욕의 60년 세월…YS 큰 발자취 따라가 보니

‘민주주의 큰별’ 뜨고 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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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서윤기자 |  2015.11.23 11:23:08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12시22분 서거했다. 향년 88세.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 업적과 각종 개혁 추진은 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민주주의의 큰 별’이 뜨고 지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어땠을까. (CNB=최서윤 기자)

▲故 김영삼 전 대통령 영정이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놓여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최다선 국회의원, 고난의 정치역사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와 어머니 박부연의 외아들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호는 거산(巨山).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최연소로 당선돼 제5·6·7·8·9·10·13·14대 국회의원까지 9선 의원을 지냈다.

역사상 최다선 의원을 지내고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김 전 대통령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끊임없는 고초를 당했다. 하지만 평소 ‘대도무문(大道無門: 정도를 가면 거리낄 게 없다)이라는 신념을 갖고 정도를 걸어갔다. 

김 전 대통령은 1969년 6월13일 신한민주당(신민당) 원내총무를 지낼 당시 3선 개헌의 부당성을 알리고 개헌작업 중단을 촉구하는 대정부질의를 했다. 며칠 뒤인 20일 괴한 3명에 의해 초산(질산) 테러를 당했다. 

유신시절의 막바지인 1979년 신민당 총재를 지낼 때는 YH무역 사건으로 정권에 밉보였다. 9월29일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 중 미국에 대해 박정희 정권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한 것이 문제돼 헌정 사상 최초로 의원직을 제명당하고 가택연금됐다. 이 사건은 10월16일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다. 당시 남긴 유명한 어록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이다. 

1980년 ‘서울의 봄’ 이후에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2년간 불법 가택연금 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힘으로 날 감금할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빼앗지 못해”라며 저항했다. 신군부의 해외 출국 권유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건 23일간 단식투쟁도 벌였다.

1987년에는 신민당을 탈당, 통일민주당을 창당해 6월 민주항쟁을 주도했다. 제1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민주정의당(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다. 

1990년 1월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 김종필 전 총리가 이끌던 신민주공화당은 3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6공의 황태자’로 불린 박철언 전 의원과의 사활을 건 대결을 거쳐 대선 후보가 됐으며 1992년 제14대 대통령에 올랐다. 군정을 종식 시킨 평화적 정권 교체였다. 그렇게 국민적 열망인 문민시대가 열렸다.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사진=연합뉴스DB)


◇ 대통령 재임기간 각종 개혁 시도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갔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군의 비밀조직인 ‘하나회’부터 해체시켰다. 1993년 취임 10여 일 만인 3월8일부터 김진영(육사 17기)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육사 19기) 국군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하는 등 3개월 동안 하나회 인맥을 뿌리 뽑았다.

1993년 2월27일 김 전 대통령은 첫 국무회의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산을 공개한 뒤 공직자 재산공개를 시작했다. 32년 권위주의 시대가 만든 부정비리 등 ‘한국병’을 고치기 위한 노력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인 작업은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안으로는 민주화 운동, 밖으로는 일제 청산을 강조했다. 5·18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명명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일본이 막아 버린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위안부 문제는 공론화시켰다. ‘국민학교’ 명칭도 초등학교로 바꿨다. 대일외교에 있어서도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으로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대북정책도 획기적으로 전환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25일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며 남북 관계 진전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김영삼 정부가 내세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화해·협력 ▲남북연합 ▲1민족 1국가 등으로 구분됐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넘기기 위해 남북정상회담도 추진했다. 하지만 회담이 성사되기 며칠 전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해 아쉬움을 남겼다. 

여러 업적 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금융실명제’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12일 오후 갑작스럽게 발표했다. 이 제도 도입으로 국민은 모든 금융회사와 거래할 때 실명을 사용하게 됐다. 지하경제를 축소하고 금융거래·과세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금융실명제는 ‘경제혁명’으로 불렸다. 1995년에는 부동산실명제도 도입했다. 이는 차명을 통한 탈세와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한 경제정책이다. 이 밖에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성과를 냈다. 

◇ 많은 업적 남겼지만 임기 말 IMF사태로 흠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스스로 검소한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는다고 해서 ‘칼국수 대통령’으로 통했다.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 개방 등을 통해 국민들과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YS는 못 말려’ 등의 책이 발간된 것은 대통령이 더 이상 다가가기 어려운 권위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 정책 수용에 있어 주변과 소통하며 귀 기울인 대통령으로 통했다. 

이른바 ‘상도동계’로 불리는 정치인들도 김 전 대통령이 남긴 자산이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많은 정치인들을 발탁하고 키웠다. 현재 여권의 유력 대선주자인 김무성 대표와 친박계(친박근혜) 맏형인 서청원 최고위원도 상도동계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발을 들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이인제 새누리당 최고위원, 손학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도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민중당 출신인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수사검사였던 안상수 경남 창원시장, ‘모래시계 검사’로 불린 홍준표 경남지사도 모두 김 전 대통령이 발탁한 인사들이다. 정의화 국회의장, 맹형규 전 의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김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고 새누리당 중진의원인 정병국 의원도 상도동계 인사다.

재임 중 수많은 업적과 자산을 남겼음에도 임기 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는 그동안 쌓아온 명예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취임 초 90% 넘게 기록했던 지지율은 IMF 사태를 겪은 임기 말에 역대 최저인 8%대까지 하락했다.

1997년에 터진 IMF 사태로 재계 14위이던 한보그룹 계열 한보철강은 부도가 났다. 이를 시작으로 삼미그룹, 기아자동차, 고려증권, 한라그룹 등이 줄줄이 무너졌다. IMF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김영삼 정부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역풍을 맞았다는 평가다. ‘김영삼 회고록’ 등에는 당시 야당이 노동법 통과 등에 발목을 잡았던 것도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각료들과의 오찬에서 칼국수를 즐겨 먹었다.(사진=연합뉴스DB)


한편, 김영삼 전 대통령이 남긴 사실상 마지막 메시지는 ‘통합’과 ‘화합’이다. 김 전 대통령의 차남인 현철 씨는 “(김 전 대통령이) 2013년에 입원하셨는데 사실 말씀을 잘하진 못하셨다”며 “필담 식으로 글씨를 좀 쓰셨는데 그 때 남기신 말이 통합과 화합이었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가장으로 치러진다. 장례명칭은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이며 장례 기간은 오는 26일까지다. 정부 대표 분향소는 국회의사당에 마련되며 영결식은 26일 오후2시에 거행된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3묘역 우측 능선에 조성될 예정이다. 

(CNB=최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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