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21일이면 개정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지 1년째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출판문화산업 진흥법 일부 개정안은 모든 도서를 정가의 10%, 포인트 적립 등 5%를 포함해 최대 15%까지만 할인이 가능하도록 했다. 도서정가제는 서점가의 과다 경쟁을 막고 동네서점을 살리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시행 1년. 정가제는 잘 정착하고 있을까? (CNB=최서윤 기자)
출판사들, 할인폭 제한하자 사은품 공세
양은냄비·영화표·담요·목침…종류도 다양
정가제 시행 후 책판매 감소…득실 논란
법안 시행 이후 출판사의 매출액과 소비자의 구매액은 줄어들었고, 온라인 서점의 영업이익만 증가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도서정가제가 ‘제2의 단통법’이라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하지만 서점협회를 중심으로 일각에서는 정가제가 정착돼 가고 있다는 반박도 나온다.
도서정가제는 지난 2003년 2월, 처음 시행됐다. 당시 출판 및 인쇄진흥법은 온라인서점에 한해 출간 1년 이내 서적을 신간으로 분류, 10% 가격할인을 할 수 있도록 정했다. 출간 1년이 넘는 책들은 할인폭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는 벤처 열풍을 탄 온라인서점의 특혜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2007년 10월, 18개월 이내 서적을 신간으로 정하고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10% 할인을 허용했다.
지금의 도서정가제는 새정치민주연합 최재천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이다. 2013년 1월, 최 의원은 발의 배경에 대해 “현행법상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규정에 따라 재판매가격유지 대상 저작물의 종류와 유통범위를 제한하는 모순이 있고, 예외를 지나치게 넓게 인정하고 있다”며 “신간도서는 최대 19%까지, 구간도서와 실용서 등은 무제한 할인이 가능해 도서정가제가 유명무실한 실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개정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곳곳에서 과다 마케팅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때문에 개정 도서정가제가 변칙적인 영업 행위를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도 많다.
특히 최근 국내 대형출판사인 ‘문학동네’가 김훈의 신간 ‘라면을 끓이며(1만5000원)’ 예약판매에서 양은냄비와 라면을 사은품으로 제공한 것이 적발돼 출판업계에 제동을 걸렸다. 지난 13일 출판유통심의위원회(심의위)는 문학동네의 사은품 제공이 도서정가제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심의위는 또 ‘창비(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8(1만8000원)’도 온라인서점인 알라딘에서 마련한 편백나무 목침 등의 사은품을 고가로 보고, 정가제 위반으로 판단했다. 신경숙의 표절 파문 등 사태로 문학동네와 창비는 ‘문학권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문학동네 계열사인 ‘휴먼큐브’가 지난 9월 발간한 조은호의 ‘사도(1만3000원)’의 경우, 일부 서점에서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사도의 CGV 예매권을 선착순 사은품으로 끼워 넣은 것이 CNB에 의해 목격되기도 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하 출판진흥원) 측은 책 사은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할 예정이다. 그러나 현행 책 가격의 5% 사은품 제공은 합법적인 만큼, 해당 범위 내 사은품 제공은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교보문고는 3만원 이상 구매고객에게 머그잔을, 홍익문고는 10만원 이상 구매고객을 단골손님으로 보고 연극 티켓을 주는 행사를 진행 중이다.
온라인서점은 아예 사은품 코너란이 있다. 포인트 차감이나 추가 결제를 통해 사은품을 제공함으로써 정당한 ‘끼워 팔기’를 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책을 사니까 사은품이 받은 것이 아니라 사은품을 받기 위해 책을 구매한다’는 웃지 못 할 일도 발생한다.
알라딘의 경우 5만원 이상 구매자에게 보온병 혹은 냄비받침을 제공한다. 인터파크는 창비가 발간한 최규석의 송곳 세트(3만3000원)를 사면 10% 할인은 물론, 무릎담요까지 준다. 예스24의 경우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책 구매시 독서노트를 제공한다. 리브로는 셀레스틴 런칭 기념으로 다이어리를 증정한다.
사은품 제공만이 문제가 아니다. 카드사 제휴, 쿠폰을 통한 추가 할인도 논란거리다.
인터파크, 알라딘, 예스24, 지마켓, CJ몰, 옥션, 11번가, 롯데닷컴 등 상당수 온라인 서점과 쇼핑몰에서는 삼성, 신한, 현대, 롯데, BC, NH농협, KB국민카드 고객에게 5%~50%까지 할인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영풍문고는 NHN엔터테인먼트가 만든 간편결제 서비스인 페이코(네이버페이)로 1만원 이상 첫 결제시 5000원을 즉시 할인해 준다.
온라인 서점의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재정가 도서를 파격 할인해 주는 것처럼 홍보하는 꼼수도 등장했다.
서울특별시 도시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지하철 역내에는 행복문고가 있다. 한국출판협동조합 산하인 이 행복문고는 재정가 도서를 표기하면서 ‘할인, 특가, 착한 가격’ 등 문구를 함께 내걸고 판매 중이다. 조합에서는 각 지점을 통해 지정도서를 골라 3권을 묶은 뒤 9900원에 판매하도록 하고 있다. 얼핏 보면 ‘할인’ 같지만 사실 ‘재정가’다. 재정가는 발간된 지 18개월이 지난 도서의 정가를 다시 매길 수 있는 제도다.
하지만 채근담(고전산책) 등 일부 서적은 간행물 재정가공표시스템에서 확인 결과, 재정가 도서 목록에 없었다. 지난해 1월 초판된 채근담은 정가 1만6800원에서 7000원에 판매 중이다. 그러나 온라인 서점에서는 지난해 10월 발간을 기준으로 10% 할인 판매(1만5120원)를 하고 있다.
출판진흥원 관계자는 “도서를 50% 할인했다면 도서정가제 위반이 맞지만 재정가 도서라면 위반이 아니다”라며 “판매촉진을 위해 홍보를 그렇게 한 것 같은데 할인은 아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재정가 도서는 사실상 중고 도서다. 구간과 신간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10% 할인을 적용한 개정 도서정가제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 줄지 않는 이유다.
온갖 편법이 난무하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은 쌓여 가고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도서정가제’만 검색해도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볼멘소리가 많다. 반면 서점협회 관계자들은 ‘정착 과정’이라며 지켜보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애초 개정 도서정가제를 발의한 새정치연합 최재천 의원은 CNB와 통화에서 1년 평가에 대해 “도서는 일반 상품과 달라서 지나치게 시장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며 “법을 발의했을 때는 도서에 있는 거품을 빼자는 취지였다. 1년으로는 평가가 어렵다. 이제 출판업자와 유통업자, 시민들이 판단할 일”이라고 말했다.
작년 법안 통과 당시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과 서용교 의원은 기권했다.
이 의원은 “도서는 유통과정에 문제가 많다. 출판사보다 서점이 갑질을 한다. 때문에 아무리 가격을 매겨봤자 소용이 없다”며 “글 쓰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지 않나. 시장원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서용교 의원은 “독서를 많이 해야 대한민국의 국력이 신장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도서정가제는 실제 국민독서량을 늘리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며 “개인적으로 마을의 문고나 군대 등에 책 보내기 운동을 많이 하는데 정가제를 하면 기업들의 도서 기증이 줄어들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실제 그동안 ‘단가 입찰제’를 통해 도서를 구입했던 공공도서관 중 일부는 정가제 시행 전에 필요한 책을 구입한 사례가 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23일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도서관들도 정가 판매 대상에 포함 됐지만 도서관 장서 구입 예산은 늘어나지 않았다”며 “상대적으로 장서 구입하는 양이 축소가 돼 버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도 같은 라디오에서 “(정가제 시행 이후) 전체적인 매출은 크게 감소했다”며 “예를 들어 전집류 같은 경우 홈쇼핑 판매가 불가능해져서 대형 출판사들 의 매출이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정가제 시행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백 대표는 “과다 할인 경쟁을 자제시키고 좋은 책이 생산돼서 유통되고,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질적 경쟁을 유도하는 효과가 크다”라고 주장했다.
한 소장 또한 “전체적으로 문학 시장이 침체가 된 것이지, 자꾸 정가제하고 연결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라며 “정가제는 문화를 살리는 힘”이라고 강조했다.
박대춘 한국서점조합연합회 회장도 CNB와 통화에서 “그동안 최저입찰가로 접근하지 못했던 동네서점들의 도서관 납품이나 지자체 납품이 도서정가제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며 “아직 시행단계라 부정적인 측면이 더 부각되고 있지만 계속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임배 한국학술출판협회 사무국장은 “교과서와 대학 교재 등 학술지는 다른 분야와 다르게 이전부터 도서정가제를 시행해 온 터라 영향을 덜 받는다”며 “당장은 소비자들이 할인에 익숙해져 있어서 불편해도, 중장기적으로 보면 중소서점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고 역설했다.
최근 ‘2015서울국제도서전’을 주최한 대한출판문화협회 김신영 차장은 “할인을 생각하고 행사장을 찾는 소비자들은 불편했을 수 있다”며 “뭐든 법을 어기는 경우는 있다. 출판업계를 살리기 위해 정가제는 자리 잡아야 한다. 향후 완전도서정가제를 만들자는 것이 협회 쪽 입장”이라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김종덕)는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역서점 활성화를 이끌 ‘비씨문화융성카드’ 출시 업무 협약식을 열었다. 지역서점에서 책을 살 때 15%의 청구할인을 받을 수 있는 이 카드는 정부가 내놓은 지역서점 활성화 방안 중 하나다.
서점협회는 환영해도 소비자들의 원성이 높은 도서정가제. 대형 출판사와 서점들의 변칙적인 영업 행위로 인해 중소서점의 판매매출 상승효과는 미지수라는 지적이 여전하다. 국민독서량도 증가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보다 적극적으로 중소서점 살리기와 국민독서량 늘리기에 고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편, 변칙적인 영업행위는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 클린북 등을 통해 신고하면 된다.
(CNB=최서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