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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현장] 분단 70년의 상흔…'군산학도병' 생존자 동행기

'대학생 국토대장정'서 만난 신재준씨…가슴에 묻은 '청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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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서윤기자 |  2015.08.10 08:53:25

올해는 광복70주년이다. 70년 전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벗어나 한 마음으로 광복을 맞이했다. 기쁨은 잠시였다. 남북은 이내 미국과 소련(현 러시아) 군정에 의해 갈라졌다. 광복70주년과 동시에 분단70년이 된 이유다. 

분단은 1950년 6·25전쟁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남북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다.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 중에는 학생 신분도 많았다. 학도의용군(이하 학도병)이다.

어린 나이에 펜 대신 총을 잡고 전선으로 나섰던 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영원히 새겨야 할 상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CNB는 광복70주년이자 분단70년을 맞아 지난 7일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도병 생존자와 일일동행 했다. 
(CNB=최서윤 기자) 

▲1950년 강원 양양에서 20사단 62연대 수색중대 제1소대장을 지낸 신재준 회장(사진 앞줄 왼쪽).

마지막 보루 낙동강 방어선 목숨 걸고 지켜
학도병으로 참전해 소위 계급장 달고 북진
군번 없는 용사들, 유해도 못찾아 안타까워
전쟁은 씻을 수 없는 상처… 평화통일 되길

“전쟁은 하지 말아야 해. 지금 생각하면 전쟁은 이념 싸움이지. 민주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내가 볼 때 여러분들은 내 손자 손녀 같이 정말 귀여워.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금보다 더 좋게 만들고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네.”

이날 한국자유총연맹(회장 허준영)이 주최한 ‘나라사랑 평화나눔 대학생 DMZ 국토대장정’ 프로그램 중에는 ‘6·25 세대와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시간이 주어졌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학도병 신재준 회장(82)의 이야기를 듣는 자리다. 

신 회장은 전북 군산중 5학년 때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학도병은 당시 중학교 4~6학년 중 참전한 군인을 말한다. 남학생들은 총을 쐈고, 여학생들은 정훈교육에 나섰다. 학도병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벌어진 ‘포항여중 전투’를 다룬 영화 ‘포화 속으로’에는 학도병들이 목숨 바쳐 싸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1950년 9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북진(北進)하던 중 평안남도 사리원에 있는 보병학교에 들어가 1951년 1월, 소위에 임관했다. 그리고 같은 해 강원 양구 북방 분지(일명 펀치볼. Punch Bowl) 고지 전투와 크리스마스 고지 공방전 등에 참전했다. 학도병으로 들어간 할아버지는 10여 년을 군대에서 생활한 예비역 대위 출신이다. 현재 전라북도 학도병 회장을 맡고 있다.    

국토대장정에 참가한 100여 명의 학생들은 강원 양주 전쟁기념관에 모였다. 폭염의 날씨 탓에 기념관은 무척 더웠다. 학생들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신 회장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63년 만에 양구를 찾았다는 그는 어린 학생들과의 만남에 무척 상기됐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군 출신답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들려줬다. 

“나는 말이여~ 학생들을 보니까 내 손자 손녀를 보는 것 같이 좋네. 그러니께~ 내가 군산중학교 5학년, 17살 때 군인들이 와서 4학년부터 6학년을 남으라고 하더니 ‘우리나라가 위태롭다. 너희들이 지켜야 한다’고 하더라고. 6·25사변이 터져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이거여.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내려왔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1950년 7월 12일, 군산중학교 4~6학년 학생 200여 명은 군산역에 집결했다. 

“군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주, 남원을 거쳐 지리산 자락을 넘고 섬진강 다리를 건너 하동국민학교(현 하동초등학교)에서 1박을 했지. 동네 아주머니들이 만들어 준 주먹밥을 먹고 새우잠을 잤다니까. 진주, 사천, 마산까지 걸어갔지. 마산에 오니까 군인들이 무조건 트럭에 타라고 하더라고. 어디 가는지도 몰랐지. 낙동강 전선에 도착하니까 위에다 대고 총을 쏘라 이거야. 왜 쐈겠느냐. 인민군한테 아군이 이쪽을 지키고 있다고 표시하기 위해서였지.”

신 회장은 학생들에게 대구 북방 팔공산 위 다부동 전투와 경주 북방 안강기계 전투, 포항 전투에 대해서도 들려 줬다. 다부동 전투는 당시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이 승리로 이끈 전투였고, 포항 전투는 3사단장인 김석원 장군이 지휘했다. 

“대구 팔공산 위에 다부동이라고 있어. 팔공산을 빼앗기면 대구가 함락되는 상황이었지. 대구가 함락되면 일사천리로 전부 점령당하는 거였어. 다부동전투와 포항전투가 굉장히 치열했지. 그때 지휘관이 백선엽 장군이었는데 학도병들을 모아서 사단을 조직했어. 영화 ‘포화 속으로’에 보면 71명의 학도병이 포항여중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지. 학도병들이 다 지킨 거지.”

1950년 8월, 부산 서면과 동래 사이 거제 방직공장에서는 신병교육대 S-3(기간요원)로 부산 일대 지원병을 가두 모집했다. 당시 교육대장이 이원익 소령, 부관 김정한 중위였다. 

“지원병을 모집했는데 부산 일대 대한민국 청년들이 다 모였지. 나는 사리원까지 북진을 했고. 1951년 1월에 육군 소위 계급장을 달았어. 강원도 양양에서 20사단 창설요원으로, 62연대 수색중대 제1소대장을 맡았지. 그때 소대장 숙소는 반지하 천막이었는데 이가 바글바글했어. 이가 새 물을 만나서 좋았는지 나한테 잔뜩 붙어서 그거 잡느라 고생했지. 미국에서 가져온 약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뿌려서 잡았다니까.” 

▲신재준 회장이 7일 국토대장전에 참가한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신 회장은 제1소대장을 지내며 백암산 토솔산에서 진지(陣地)작업을 구축했다. 펀치볼에서는 잠복근무를 했다.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벌어진 펀치볼 전투는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가 참전했다.  

“토솔산은 해병대와 인민군이 싸웠던 격전지야. 전부 바위로 이뤄졌지. 그곳에서 작업하던 도중 땅에서 해병대 시신 8구를 찾았어. 시체가 이미 다 썩어서 군번줄을 보고 신원을 확인했지. 신원 확인해서 후송하는 작업이 끝난 다음에 펀치볼에 왔어. 거기에서 5개월 동안 전투를 했고. 펀치볼은 미군 45사단에서 지키고 있었지. 펀치볼 앞에 772고지, 795고지가 있었고, 밑으로 내려가는 그린업(green up) 능선이 있었어. 미군들의 강점은 화력이 좋다는 거였는데 후방지원에 약해서 밤에는 우리가 불리했지.”

그는 들고 온 서류를 뒤적이며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사진이었다. 

“그때 전투복장이지. M1과 카빈 소총인데 성능이 좋았어. 인민군이 갖고 있는 따발총은 성능이 떨어졌지. 인민군은 약아서 우리가 잠복근무를 나간 밤에 등 뒤에서 따발총을 쐈어. 아군들이 많이 죽었지. 밤에는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새벽이 돼서야 찾으러 갔지. 선임하사랑 내려가서 시선을 업고 왔어. 비극이 따로 없었지.”

1951년 12월, 펀치볼 좌측 가칠봉 앞에서는 크리스마스 고지 공방전이 벌어졌다. 신 회장은 이 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을 맞고 옆구리 부상으로 수술을 받았다. 

“미군의 화력이 좋아서 우리가 뒤에서 인민군들을 완전히 제압했지. 위에 올라가면서 포를 쐈고. 포를 쏘니까 인민군들이 죽었지. 어떤 인민군은 크게 부상을 입었는데 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살려달라고 하더라고. 제네바협정에는 아군이나 적군이나 부상병은 반드시 병원에 후송해야 했어. 그런데 선임하사가 총을 쏘더라고. 후송 도중에 죽는다 이거지. 왜 고통스럽게 죽게 하느냐는 거였어.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저 사람도 집에 가면 귀한 자식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 나는 후퇴하던 중 인민군이 쏜 총에 파편을 맞아 병원에서 치료 받고 한 달 안에 원대복귀 했어.”

신 회장은 1952년 2월, 20사단 62연대 수색중대로 복귀했다.

이날 신 회장의 강연을 들은 이인준 씨(26)는 기자에게 “우리는 전쟁세대가 아니라서 6·25를 글로 배웠다. 학도병이 직접 전쟁 실화를 들려주니까 듣는 내내 소름이 돋고 가슴이 뭉클했다. 한편으로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오한초록 씨(26)도 “우리 세대는 문학 작품으로 전쟁을 간접 경험했다. 예전에 ‘소문의 벽(이청준 작)’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주인공 박준에게 낮에는 아군, 밤에는 북한군이 와서 누구 편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가 낮에는 아군이, 밤에는 인민군이 주둔한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소설 속에서만 보다가 ‘이게 진짜 현실이었구나. 이 편도, 저 편도 들 수 없는 상황에서 국민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강연에 뜻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7일 강원 양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신재준 회장과 국토대장정 참가 대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며 손을 흔들고 있다.

못 다한 이야기… "군산시 미면은 빨치산들이 양민 학살한 곳"

신재준 회장은 강연을 마치고 대학생기자단인 ‘리얼코리아’와 함께 을지전망대로 향했다. 신 회장은 을지전망대로 가는 도중 CNB 기자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내가 여기 펀치볼에서 싸웠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때 우리 쪽 전선에서 2km, 북쪽에서 2km, 합쳐서 4km가 DMZ(비무장지대)야. 저기가 무주공산이지. 에고~ 아까 자세하게 얘기해줄 것인디, 시간이 모자라서……. 내가 군산역에서 출발할 때 어머니와 막냇동생이 마중을 나왔어.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 이거여. 그 얘기를 또 안 해줬네. 1951년 2월, 4월에 이승만 대통령이 복교 명령을 내렸어. 학생들은 그만 싸우고 가서 공부하라고. 그런데 나는 이미 복교를 할 수 없었지. 군번을 받아 버렸거든. 군번을 안 받은 사람은 학교로 돌아갔지. 나는 돌아가지 못하고 군대에서 장교로 임관했어. 그 때 군대 행정은 일정하지 못했으니까.” 

신 회장은 군대에 남았고 크리스마스 고지전에 참전했다. 아군은 크리스마스 고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인민군과의 육박전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는 철수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나중엔 미군이 준 전투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할 얘기가 많당께~. 낮에는 우리 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점령했지. 사병들이 음식을 어떻게 먹었는지 알아. 취사장에서 밥을 지어서 차로 싣고 올라와. 그런데 눈이 많이 오니까 제설작업도 안 되고 차가 못 올라왔지. 사흘 동안 건빵만 먹고 지냈다니까. 나중에 미군 헬기가 와서 ‘씨레이션(C Ration)’이라고 통조림을 뿌려줬어. 눈을 파고 들어가서 깡통을 따고 먹었지. 씨레이션 한 통에 각종 식료품이 다 들어가 있었어. 고기에 비스켓, 커피까지 있었으니까.”

tvN ‘삼시세끼’에서는 가끔 나영석과 이서진의 대화에서 ‘빨치산’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빨치산은 프랑스어로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의 ‘parti(파르티)’에서 유래했다. 비정규군을 일컫는 단어로, 북한 빨치산은 산세가 험한 지리산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신 회장의 주변 사람들은 빨치산에 의해 학살당했다. 

“빨치산은 빨갱이하고 인민군이 산에 들어가서 저항한 부대여~. 군산 미면에 빨갱이들이 많았어.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양민들한테 회의한다고 불러 잡아놓고 우물에 빠뜨렸지.”

빨치산, 아픔이 있기에 사실 TV에서 가볍게 말할 단어는 아니다. 빨치산 얘기가 나오자 옆에 있던 동생인 신권균 씨(80)가 자신이 잘 안다며 거들었다. 

“1950년 9월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아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하면서 인민군이 후퇴했지. 그때 빨치산들이 밤에 돌아다니면서 인민회의 하니까 모이라고 하고는 사람들을 창고에 몰아넣었어. 인민회의 하러 간 사람들이 끝나면 와야 하는데 다들 행방불명 됐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고. 나중에 남원에서 빨치산들 토벌할 때 사람들이 죽었다는 걸 알았지. 빨치산들이 호명조가 있고, 운반조가 있었어. 호명조가 사람들을 창고에 집어넣고 호명을 했지. 방아 찧는 몽둥이를 들고 있다가 사람들이 나오면 머리를 쳤어. 시신은 우물에 집어넣고. 그래서 못 찾은 거였어. 빨치산이 양민들을 학살했지.”

신 씨는 그 때 학살당한 가족들의 시신을 직접 봤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직접 갔지. 매형하고 조카 찾으러. 조카는 젊으니까 반항을 해서 많이 맞았는지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어. 의복하고 양말 보고 찾았지. 매형은 때리려니까 도망갔어. 스스로 우물에 들어갔지. 얼굴이 깨끗했어. 찾아서 안장했지. 면장의 딸이었던 형님의 여자친구는 빨치산들이 산채로 대창으로 찌르고 땅을 파서 묻어버렸지. 빨치산들이 아주 악랄하게 양민들을 학살한 곳이 군산 미면이야.”

▲63년 만에 강원 양구를 찾은 신재준 회장(사진 가운데)과 동생 신권균 씨(사진 왼쪽).


이 모두 전쟁이 가져다 준 아픔이자 비극이다. 현재까지 진행 중인 또 다른 비극은 학도병을 포함해 국군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전사했지만 아직도 13만여 위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유해 발굴 사업을 하고 있지만 전사자 관련 자료 부족과 DNA 검사 의존 방식, 지형 변화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 회장이 전북 학도병 회장을 맡고 있어서 명단을 갖고 있어도 행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나한테 12명 전사자 명단이 있어. 그런데 학도병 나가서 죽었는지, 이북으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어. 지금 유해발굴단이 지리산 일대 시신을 발굴 중이여. 치아에 면봉을 대고 몇 번 문질러서 DNA를 동사무소에 맡겨 두면 되는데 홍보가 잘 안 돼서 못 찾고 있어.”

신 회장은 목에 건 훈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찾지 못한 학도병 유해에 대한 안타까움도 컸다. 

“이거는 박근혜 대통령이 그때 싸웠던 사람들한테 준 호국영웅기장이야. 나갔어도 못 받은 사람도 있어. 나는 운이 좋아서 전쟁터에서 무사히 돌아왔고 이렇게 훈장도 받고 했지. 유해를 못 찾은 사람들도 많으니 빨리 찾아야 할 텐데 걱정이야. 빨리 시신을 찾아서 국립묘지에 안장해야지. 6·25 사변 때 국군 장병이 16만 명 죽었는데 동작동, 대전, 영천, 임실 등 국립묘지에는 6만 명밖에 없어. 학도병들이 많이 죽었는데 유해를 찾지 못했으니 그 부모는 쓰라린 가슴을 안고 돌아가셨고. 나라에서 관심 갖고 유해 발굴을 잘 해줘서 한을 풀어줘야 해. 그래야 국가관도 커지고 애국심도 커지는 거지. 솔직히 우리나라 고위층, 국회의원들 중에 군대 갔다 온 사람 얼마나 있어. 위에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해.”

신 회장은 전쟁을 치렀지만 누구보다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종전 국가가 아니라 휴전 국가다. 언제든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때문에 남북통일은 신중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더 늦기 전에 얼마 남지 않은 참전 군인들의 한(恨)을 하루라도 빨리 풀어 주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어떻든 전쟁은 슬픈 것이야.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겠지. 남한보다 북한 땅덩이가 더 커. 지하자원도 많고. 북한하고 타협하고 대북정책을 잘 해야 돼. 북한이 빨리 핵무기를 버려야 하는데 이제 30살 먹은 김정은이 뭘 알겠어. 빨리 통일이 돼야 할 건디…….” 

(CNB=최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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