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첫 시험 때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어요. 떨어졌다는 생각에 밥이라도 얻어먹고 가자는 심정으로 제 것까지 시킨 뒤 심사위원들에게 계산하면 된다고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몰라요.”
개그 콩트에 등장할 것 같은 이 사연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SBS 8기 개그맨 현병수가 들려준 개그맨 데뷔 스토리는 기상천외했다. 서울종합예술전문학교 개그MC예술학부 겸임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하 웃찾사), tvN ‘코미디빅리그’ 등 개그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며 개그맨 생활 10년차를 맞이한 그에게도 데뷔 시절이 있었다.
“법조인 꿈꿨던 그, 어머니 한 마디에 개그맨의 길을 걷다”
앞서 언급한 심사 현장에서 자장면을 먹는 기상천외한 행동은 심사위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1차 시험에 합격했다. 2차 시험 관문도 무사히 넘고 3차 시험은 이를 갈고 준비했다. 차력쇼를 짰는데, 미리 건물을 청소하는 아주머니께 자신이 방을 더럽히면 뺨을 때려 달라고 부탁을 하며 합을 맞췄다. 마지막 최종 시험에서는 정주리와 팀을 이뤘는데 여기서 웃찾사 역사에 꼽히는 유행어 “따라와”가 탄생했고 1등까지 꿰차는 쾌거를 이뤘다.
개그 첫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던 그에게 개그가 천성인 것 같다고 하자 의외로 “원래 꿈은 법조인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주변에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상황을 보고, 직접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동국대 법학과까지 졸업했다고. 현재와는 전혀 다르게 이어질 것 같은 인생의 방향이 바뀐 것엔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법대에 가긴 했지만 고시에 2번 낙방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상황이라 어머니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빨리 일을 찾고 싶었죠. 당시 어머니가 방송 코디네이터일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지나가는 소리로 ‘개그맨 시험이나 봐볼까’ 하니 어머니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말에 괜히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마침 당시 웃찾사 개그맨 모집공고가 나왔기에 어머니 몰래 시험을 봤고 거기서 자장면을 먹었던 거예요.”
하지만 개그에 대한 의지를 불태워준 어머니는 합격 소식을 듣지 못하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현병수는 “어머니에게 합격 소식을 정말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안타까웠다. 어머니 덕분에 1등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개그맨 시험 1등 꿰차고 찾아온 무명 생활 9년”
그렇게 계속해서 상승세를 타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병수는 “개그맨 시험에서 1등을 하고 무명 생활이 9년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고 담담하게 털어놨다. 웃찾사 전성기 시절 다양한 코너를 선보였지만 코너 이름은 기억해도 현병수라는 이름을 기억해주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웃찾사를 떠나 ‘코미디빅리그’에 처음 도전할 때도 시련이 닥쳤다.
코미디빅리그에 첫 소개됐을 당시 화제가 됐던 코너 ‘마초맨’을 기억하는가? 방송인 홍석천과 느끼한 리마리오 캐릭터로 유명세를 떨쳤던 이상훈이 남남커플로 호흡을 맞춘 코너다. 18년 만에 공개 코미디에 출연한 홍석천, 오랜만에 방송에 복귀한 리마리오가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런데 처음 이 코너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구성했던 이가 현병수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랜만에 홍석천과 이상훈을 만나기로 한 현병수는 두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퀴어 개그 ‘마초맨’에 대한 첫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이 아이디어에 홍석천과 이상훈도 “재미있겠다”며 적극적인 관심과 호응을 보였고, 함께 머리를 맞대어 코너를 완성시켰다. ‘마초맨’이 방송되고 실시건 검색어 순위에 오르내릴 정도로 화제가 됐지만 현병수의 이름은 정작 뒤로 묻혔다.
솔직히 섭섭했을 법한 상황. 하지만 그는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제가 웃기지 않는 역할을 한다고 불만을 가지면 조화를 이룰 수가 없어요. 제 스타일이라고 생각되는 개그가 있으면 앞으로 확실히 나서겠지만, 저는 다양한 개그 아이디어를 내고 다른 개그맨들을 받쳐주는 역할도 마다하고 싶진 않아요. 개그는 혼자만 웃겨서 되는 게 아니라 팀과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데뷔를 늦게 한 후배들이 먼저 뜰 때도 있지만, 꾸준히 열심히 하면 저 또한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웃기지 못하면 우스운 사람 되지만 그래도 개그맨이고 싶다”
현병수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지만 그는 현재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활약하고 있다. 코미디빅리그에서 직장인들의 애환을 묘사하는 ‘리액션 스쿨’ 코너를 선보이고 있고 새 개그 코너에 대한 아이디어도 구상 중에 있다. 이 가운데 YTN 채널에서 청년 창업도전에 희망을 주는 ‘청년창업런웨이’와 생활 속에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판도사 3.0’, 그리고 C&M 채널에서 여러 지역의 명소를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맡았다.
그리고 인터뷰 당시에도 ‘뽀뽀뽀’ 후속으로 화제가 된 ‘똑?똑!키즈스쿨’ 프로그램 촬영을 막 마치고 온 터라 가쁜 숨을 고르며 답변을 이어갔다. 방송 뿐 아니라 솔직한 화법을 담은 개그로 현장 분위기를 띄우고, 탁월하게 진행을 이어가는 능력을 인정받아 각종 행사 현장에서 섭외 요청이 들어와 스케줄 일정이 빼곡히 차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의 연속이다. 여기에 또 한 가정의 가장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서의 역할도 있다. 그리고 개그맨으로서 웃기지 못하면 야유를 받거나 무관심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늘 치열한 경쟁 속에 있는 인생이다. “솔직히 힘들다”고 고백하는 그이지만 동시에 “그런데 개그에서 느끼는 희열이 피로보다 크다”고 말했다.
“제가 웃찾사에서 ‘건강택시’라는 코너를 했을 때 세상에서 들어본 것 중 가장 큰 웃음소리를 들었어요. 제 개그에 사람들이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느꼈죠. 그때의 느꼈던 개그의 맛과 희열을 잊지 못해요. 그 맛을 보고나니 중독돼서 아무리 힘들어도 놓지를 못하겠어요. 매일 어떤 개그를 만들지 고민합니다. 억지로 만드는 게 아니라 정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는 개그를 만들고 싶어요.”
현병수는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개그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스스로의 입으로는 아마 마흔 정도가 자신의 개그맨 수명 데드라인이 되지 않을까라고 점쳤지만 인터뷰 도중에도 무궁무진하게 쏟아지는 개그 아이디어를 들어보니 그보다는 훨씬 길게 그의 개그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세상 모든 것은 고통으로 차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개그를 창작하는 것 자체에도 고통이 있지만 저 또한 그 과정을 극복하고 새로운 개그, 신선한 개그로 여러분들을 웃겨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